철거 현장서 수년간 물건 수집…인천 스페이스 빔서 전시
실향민 굴막·노포 흔적…사라진 동네 유산 보존한 주민들
이북 실향민들이 모여 굴을 까던 굴막도, 대장장이가 30년 넘게 '배 못'을 만들던 철공소도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졌다.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는 생활의 흔적이 잔뜩 묻어 얼핏 보기에 자질구레한 물건들만이 남았지만, 주민들은 이를 보존해 하나의 유산으로 남겼다.

지난 21일 인천시 동구 창영동 문화예술공간인 스페이스 빔에 들어서자 작은 투망 형태의 어구와 굴 캐는 도구들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모두 2년 전 철거된 동구 화수동 만석부두의 굴막에 수년간 남아 있던 것들이다.

판자와 비닐로 얼기설기 지어진 굴막은 한국전쟁 이후 50년 넘게 실향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대부분 북한 황해도 출신인 실향민들은 30여 채의 굴막에 모여 살며 인근 용유도·무의도 등에서 갓 따온 굴을 까서 내다 팔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많은 실향민의 보금자리던 이곳 굴막은 점차 비기 시작해 폐허처럼 방치됐고, 2019년 결국 철거됐다.

당시 굴막이 철거된다는 소식에 다급히 현장을 찾아 남아 있던 물건들을 수거해온 건 민운기(57) 스페이스 빔 대표와 동네 주민들이다.

곧 쓰러질 듯한 굴막 안에는 실향민들이 굴을 캐거나 까는 데 쓰던 작업 도구, 스티로폼 어구, 낡은 작업복이 즐비했다고 한다.

민 대표는 "세월의 흔적이 담긴 현장이 철거된다고 해서 어떻게라도 이를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에 지인 몇 명과 남아 있던 물건들을 가져왔다"며 "상태가 좋은 10점 정도는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고 설명했다.

실향민 굴막·노포 흔적…사라진 동네 유산 보존한 주민들
같은 방식으로 개발과 철거에 밀려 끝내 사라진 원도심 동네 유산들의 흔적도 잇따라 수집됐다.

대장장이인 고 박상규씨가 1974년부터 30년 넘게 운영했으나 철거된 신일철공소에서는 목선(木船)에 쓰이는 못과 박씨의 자필 서류 등을 꺼내왔다.

1970년대부터 운영되다가 2014년 문을 닫은 중구 용동의 노포 '마음과 마음', 2020년 철거된 동구 금창동 '아리랑 다방' 등 오래된 노포에서도 간판, 메뉴판, 맥주잔 등 잡다한 흔적들을 수거했다.

스페이스 빔은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7년 넘게 창고에 보관해오던 이 물건들로 이달 21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인천시 동구 인천문화양조장에서 아카이브 전시를 연다.

1965년 운영을 시작했으나 수산관광 활성화 사업으로 철거된 부두 선술집 '부산관', 일제강점기에 세워졌으나 지난해 사라진 오쿠다정미소 등 지금은 사라진 건물들의 사진도 함께 전시된다.

민 대표는 23일 "그냥 보면 어디서도 대접받지 못할 폐기물일 수 있지만 개발과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진 지역 유산의 흔적들"이라며 "사람이 죽으면 예를 갖춰 보내드리듯 오랜 세월 지역과 함께 한 역사를 재평가하고 성찰할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