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부처님 오신 날에 야석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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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orumplus@hanmail.net >
야석(也石)은 박희선(朴喜宣·1923~1998) 선생의 아호다. 그는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이자 불교학자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에서 복무 중 탈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마포형무소 수감 중 해방을 맞이했다.
돌과는 육친(肉親)이라며 스스로 아호를 야석(也石·또한 돌)이라고 했고 거의 평생을 길 위에서 산 기인(奇人)이기도 하다. 불교학에 전념하며 인생의 심층을 경작한 빛과 구원의 시인으로 다시 그 명성을 높이 받들 수 있을 것이다. 제1회 빛과 구원의 문학상(1998)을 받았고, 역시 제1회 호서문학상(1996)을 받았다. 평생 시집 10권(3권 편저), 소설집 2권, 불교에세이집 18권(공저 2권, 편저 2권) 등 30권의 저서를 남겼다. 입적 후 3권의 추모문집이 발행되고 충남 공주 갑사 입구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논산 양촌의 선산에 법사탑이 세워졌다.
그는 어렵게 가정을 꾸리고 한때 대학 강단에서 시학 강의에 열정을 바쳤지만, 1960년대 초반 불문에 입문해 바랑을 메고 고행의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시인이 되고 스스로 부처가 된다. 범인이 생각하는 고통의 원인인 그 ‘애착’과 ‘집착’을 불교와 시에 돌려놓고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탐욕의 종자를 말려버린 듯 그의 가슴은 광장처럼 넓어졌다.
사려분별, 대자대비, 깨달음의 정신영역을 경작하며 해탈의 삶을 얻는 행각인 듯 그는 외롭게 또 하나의 길을 찾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으며 따뜻한 마음, 크게 자비로운 마음,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베풀고 있었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많은 시인과 스님이 있었고, 목사도 있었고, 화가, 조각가도 있었다. 출판인, 언론인, 사업가 등 다방면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 오래 기두렸던 / 달이나 떠오를 양이면 /
체온이 스민 돌 하나를 남기고 / 멀리 떠나는 / 그윽한 새벽이거라.
1958년 4월 25일 ‘紙碑’
‘지비’는 상하이 독립군 무명전사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다. 자신의 말씀대로 ‘환상적 위안’이며 ‘허망스런 심려’다. ‘울음을 대신한 선혈(鮮血)의 맹세’이며 ‘아슴푸레한 회고 또는 뉘우침’이다. 지금은 시인의 일생을 담아낸 시비의 새김시로 각인돼 있다.
야석은 또한 통일 염원의 간절한 시심을 불타정신에 접맥했다. 자유의 세상, 평화의 삶을 갈망하며 전쟁과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깨달음의 시심을 널리 보급했다. 괴질의 코로나 시국에서 심리적 거리 찾기보다 더 어려웠을 야석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 또 그리움에 젖는다.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며 가난한 삶에서 부유한 정신을 찾고, 길 위에서 길을 찾은 부처 시인 야석의 극락왕생을 다시 빈다.
돌과는 육친(肉親)이라며 스스로 아호를 야석(也石·또한 돌)이라고 했고 거의 평생을 길 위에서 산 기인(奇人)이기도 하다. 불교학에 전념하며 인생의 심층을 경작한 빛과 구원의 시인으로 다시 그 명성을 높이 받들 수 있을 것이다. 제1회 빛과 구원의 문학상(1998)을 받았고, 역시 제1회 호서문학상(1996)을 받았다. 평생 시집 10권(3권 편저), 소설집 2권, 불교에세이집 18권(공저 2권, 편저 2권) 등 30권의 저서를 남겼다. 입적 후 3권의 추모문집이 발행되고 충남 공주 갑사 입구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논산 양촌의 선산에 법사탑이 세워졌다.
그는 어렵게 가정을 꾸리고 한때 대학 강단에서 시학 강의에 열정을 바쳤지만, 1960년대 초반 불문에 입문해 바랑을 메고 고행의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시인이 되고 스스로 부처가 된다. 범인이 생각하는 고통의 원인인 그 ‘애착’과 ‘집착’을 불교와 시에 돌려놓고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탐욕의 종자를 말려버린 듯 그의 가슴은 광장처럼 넓어졌다.
사려분별, 대자대비, 깨달음의 정신영역을 경작하며 해탈의 삶을 얻는 행각인 듯 그는 외롭게 또 하나의 길을 찾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으며 따뜻한 마음, 크게 자비로운 마음,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베풀고 있었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많은 시인과 스님이 있었고, 목사도 있었고, 화가, 조각가도 있었다. 출판인, 언론인, 사업가 등 다방면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 오래 기두렸던 / 달이나 떠오를 양이면 /
체온이 스민 돌 하나를 남기고 / 멀리 떠나는 / 그윽한 새벽이거라.
1958년 4월 25일 ‘紙碑’
‘지비’는 상하이 독립군 무명전사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다. 자신의 말씀대로 ‘환상적 위안’이며 ‘허망스런 심려’다. ‘울음을 대신한 선혈(鮮血)의 맹세’이며 ‘아슴푸레한 회고 또는 뉘우침’이다. 지금은 시인의 일생을 담아낸 시비의 새김시로 각인돼 있다.
야석은 또한 통일 염원의 간절한 시심을 불타정신에 접맥했다. 자유의 세상, 평화의 삶을 갈망하며 전쟁과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깨달음의 시심을 널리 보급했다. 괴질의 코로나 시국에서 심리적 거리 찾기보다 더 어려웠을 야석의 삶을 돌아보며 지금 또 그리움에 젖는다.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며 가난한 삶에서 부유한 정신을 찾고, 길 위에서 길을 찾은 부처 시인 야석의 극락왕생을 다시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