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시기 추정할 '임술년'·'병인년' 간지 글자 확인 보리·벼·콩 등 곡식 이름 등장…물자 집중된 거점 추정
대구광역시 기념물 팔거산성에서 7세기 초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목간 11점이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팔거산성 조사기관인 화랑문화재연구원으로부터 최근 발견된 목간 11점을 인수해 색깔 촬영과 적외선 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두 차례의 판독 자문회의 등 조사를 진행한 결과, 7점에서 글자 또는 글자의 흔적이 보이고, 이 중 제작 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간지(干支)와 곡식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목간은 길이가 약 15∼23㎝, 너비가 2.2∼5.5㎝로, 8점의 목간에선 한쪽에 끈을 묶기 위해 나무를 잘라냈으며, 일부 목간에는 실제로 끈을 묶었던 흔적도 발견했다.
또 4점의 목간에서는 3종류의 간지가 발견됐다.
1호 목간에선 '壬戌年'(임술년), 6호와 7호 목간에서는 '丙寅年'(병인년)이란 글자가 확인됐고, 3호 목간에서는 글자가 있는 부분이 파손돼 두 번째 글자 일부와 세 번째 글자 '年'(년)만 확인할 수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경효 주무관은 "3호 목간의 경우 두 번째 글자가 토기 묘(卯) 자 또는 낮 오(午) 자로 추정되나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어 "팔거산성의 전반적인 연대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이어서 임술년과 병인년은 각각 602년과 606년으로 추정되며, 이는 목간을 작성한 시점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1호 목간에는 '임술년'과 이어져 '安居礼甘麻谷'(안거래감마곡)이 적혀 있다.
이에 대해 전 주문관은 "안거래는 현재 해독이 불가하고, 감마곡은 지명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목간 및 금석문 전문가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목간은 제작시기와 유구의 연대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면서 "목간이 100∼200점이 출토돼도 간지가 없거나, 간지가 있어도 겨우 1∼2점 나오는데, 이번에는 10여점 중 간지가 등장하는 목간이 4점이나 출토된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까지 간지가 적힌 목간은 연월일이 모두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번 목간에는 연도만 표기돼 있는 점이 수수께끼다"면서 "산성을 지키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을 연 단위로 사용하고 정리한 것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보이는데, 현재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또 3호 목간에서는 '麦'(맥, 보리), 4호에서는 '稻'(도, 벼), 7호에서는 '大豆'(대두, 콩)라는 곡식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산성에 물자가 집중된 상황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산성의 행정 또는 군사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연구소는 "목간에 담긴 내용이 곡식과 관련된다는 점, 삼국 시대 신라의 지방 거점이 대부분 산성이었다는 점, 기존 신라 목간이 출토된 곳이 대부분 군사와 행정 거점이라는 점에서 팔거산성도 다른 출토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으로 중요하면서 물자가 집중되던 거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 팔거산성은 금호강과 낙동강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7세기 초반 무렵 신라 왕경 서쪽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목간에는 '王私'(왕사)와 '下麦'(하맥)이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주 교수는 "왕사의 경우 기존 경남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보이는 왕송(王松)과 동일한 표현으로 추정했으나 두 차례에 걸친 판독조사 결과 기존 송(松) 자로 판독했던 글자가 사실은 사(私) 자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석축 7기, 추정 집수지 2기, 수구(水口) 등의 유구가 발견됐다.
석축은 조사지역 북쪽 경사면에 조성됐으며, 일부 유구가 중복돼 있어 석축 사이에 축조 순서 또는 시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