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당시 시골의 '국민학교' 3학년의 일기, 서울에서 11년째 사는 영국인의 고백,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는 119구조대원의 기록. 새로 나온 책들 가운데 '몽당연필은 아직 심심해'(이종옥),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다니엘 튜더), '레스큐'(김강윤) 등은 독특한 이력의 저자들이 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겼다.
1954년생 이종옥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63년부터 입대하는 1975년까지 쓴 일기 가운데 60편을 골라 그대로 복원한 '몽당연필은 아직 심심해'(글항아리)는 반세기 전 한국의 가난한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기성회비를 가져가야 하는 아이와 돈이 없어 주지 못하는 부모의 실랑이, 배가 고파 술지게미를 먹고 온 가족이 널브러져 자다가 먹은 걸 그대로 게워내는 이야기, 강냉이죽을 배급받고 돼지죽이라고 놀리는 급우들 때문에 자존심 상해서 운동장으로 뛰쳐 나가 물로 배를 채운 이야기 등 산골의 가난한 아이가 겪었던 일상이 담긴 일기장은 세밀한 심리 묘사가 일품이다.
다른 날보다 길게 쓴 가을 소풍을 다녀온 날의 일기에선 가난의 풍경이 두드러진다.
"오늘은 가을 소풍 날. 두 여동생은 보리밥 도시락을 들고 신이 나 학교로 달음질쳐 가는데 나는 가질 않았다.
이제는 아버지가 시키지 않아도 학교 안 가는 날 소풀 뜯기는 일은 내 차지다"라고 시작한 일기는 봄소풍 때의 아픈 기억도 함께 적었다.
봄소풍 때 신이 나 뛰어가다 미끄러지면서 고무신이 찢어져 맨발로 자갈길을 걸어야 했고, 김밥을 싸 온 친구들과 달리 꽁보리밥에 장아찌 도시락이 부끄러워 바위 뒤에서 몰래 숨어서 먹었다며 그때 일을 생각하고 소풍 가길 포기했다고 썼다.
소풍 대신 암소를 몰고 갈대가 많은 개울가로 가서 놀고 있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아뿔사, 오늘은 하필 이곳으로 소풍을 오고 있으니 이런 몰골을 반 동무들에게 보일 순 없지. 부지런히 소를 몰고 개울을 건너 보이지 않는 산속으로 들어가 소풍이 끝나 모두 돌아갈 때까지 숨어 있었다"고 그날의 일기를 마친다.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대필을 의심할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나 교육청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됐지만, 난생처음 탄 버스에 멀미로 기절하는 바람에 참가도 못 하고 "30리 뻐스 길에 죽을 뻔한 촌놈"이란 소문만 났다.
57년 전 일기를 꺼내놓는 것에 대해 저자는 평생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자 살아갈 힘이 됐기 때문이며 동시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다니엘 튜더는 "한국 맥주 맛없다"란 기사 등으로 유명한 인사지만, 고독한 이방인이기도 하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그의 에세이집은 도시와 동네를 산책하며 한국인의 외로움과 '나'로 살아갈 자유를 말한다.
누구나 결점투성이의 존재지만, 요기 내어 부서지기 쉬운 마음을 드러낼 때 우리가 잃어버린 연결된 느낌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전직 언론인답게 한국 사회를 예리한 시선으로 관찰한 글도 실렸다.
저자는 한국의 대표적인 정서가 정(情)이라지만, 그게 과연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어쩌면 한국은 북유럽보다 더 외로울 수 있다고도 한다.
저자는 "개인주의 전통이 깊은 나라들에는 동료 또는 가족 구성원 간의 상대적으로 약한 결속을 보완해주는 장치가 있다.
일례로 북유럽 국가는 통상적으로 높은 사회적 신뢰, 사회적 자본, 그리고 복지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부산소방재난본부 특수구조단 수상구조대 김강윤 팀장이 쓴 '레스큐'(리더북스)는 14년 차 현직 소방관의 기억 속에 각인 된 처절한 삶의 기록들이다.
구조대원들은 살려 달라고 외치는 이들 등을 구하려 사지에 뛰어들었다.
저자는 불 속에서 엄마와 함께 갇힌 어린아이를 보며 자신의 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산업현장에서 온몸이 짓이겨진 채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며 가여운 삶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매년 10여 명 이상 순직하는 소방관들의 삶을 부디 기억해야 한다고도 당부한다.
피를 토하는 만삭의 산모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수년이 지나도 그 현장을 지날 때면 눈을 감아버리는 저자의 선배 이야기는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고 큰지 보여준다.
동료를 떠나보낸 후 결국 자신도 따라서 삶을 버리는 소방관의 이야기가 결코 이들이 죽지 않는 영웅의 심장이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의 여린 마음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어떤 예술 작품들은 기괴하고 충격적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불편한 작품이 아름다운 그림보다 관객의 마음에 훨씬 더 크게 와닿는다. ‘충격 요법’으로 감각을 깨워 새로운 생각과 관점을 열어주기 때문이다.프랑스 출신 작가 피에르 위그(63)는 이 같은 충격적이고 기이한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드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카셀 도쿠멘타에 단골로 참가하고,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밥 먹듯 개인전을 여는 게 그 증거다.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전시는 여러 해외 매체에서 ‘2024년 최고의 전시’로 꼽히며 찬사를 받았다.그 전시에 나왔던 작품들을 지금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위그의 개인전 ‘리미널’(경계)에서 볼 수 있다. 베네치아 피노컬렉션 미술관과 리움미술관 등이 공동 기획한 신작 등 최근 10여 년간의 주요작 12점이 나왔다. 그의 개인전이 아시아에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거장이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명화는 좋아하지만 현대미술은 싫다’는 사람이 많다. 별것 아닌 작품을 장황한 이론과 설명으로 포장한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리미널’은 이런 생각을 바꿀 만한 전시다. 배경지식이나 이론을 몰라도, 명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눈앞에서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전시는 미술관의 블랙박스 공간에서 시작한다. 처음부터 관객은 자기 발조차 볼 수 없는 어둠에 압도당한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면 대형 영상 작품 ‘리미널’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기괴하게 움직이는 나체의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lsquo
오페라 가수 요나스 카우프만이 10년 만에 내한했다. 그는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독일어 오페라 징슈필, 푸치니와 베르디의 이탈리안 오페라, 비제와 구노의 프렌치 오페라, 성악가들의 커리어 마지막 종착지인 바그너 오페라까지 섭렵해 세계 최고 테너 중 한 명으로 꼽힌다.지난 4일 카우프만과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의 리더아벤트(리트독창회)가 열린 롯데콘서트홀 객석엔 빈자리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카우프만은 2015년 첫 내한 콘서트 때 서른 번의 커튼콜을 받을 정도로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이날 카우프만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 흰 보타이를 맨 정갈한 연미복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첫 곡은 슈만의 ‘12개의 가곡’ 중 제3곡 ‘방랑의 노래’였다. 독일에서 온 가객(歌客)은 “자~아직 취기가 남아 있을 때 떠나자”라는 가사로 시작한 방랑가를 목이 덜 풀린 듯한 음색으로 노래했다. 제10곡 ‘고요한 눈물’에서 카우프만은 과장하지 않은 발성으로 목을 풀듯, op.25 ‘미르테 꽃’ 제1곡 ‘헌정’을 부를 때는 미동 없는 자세로 자신이 낼 수 있는 소리의 반만 들려주듯 각각 노래한 후 퇴장했다.두 번째 무대에서 몸이 풀린 듯한 카우프만은 리스트의 가곡 여섯 곡을 불렀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를 부를 때 그는 소리를 바깥으로 울려내기보다 몸 안 호흡의 압력만으로 음을 밀어내듯 노래했다. 3절에서 마이너풍으로 전개된 음악이 다시 희망을 찾은 후 외치듯 부른 가사 “O Gott”(독일어로 ‘오 신이시여’라는 뜻)의 고음은 이날 그가 들려준 첫 메조 포르테(mf) 음량 표현이었다.2부에서 카우프만은 브람스의 op.63 &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끊임없이 음악을 연구해 ‘건반 위의 구도자’라고 불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모차르트 음반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발매했다.유니버설뮤직은 백건우의 모차르트 3부작 중 마지막 음반인 ‘백건우 모차르트 피아노 작품 3’(사진)을 5일 발매했다. 이 음반사는 지난해 5월과 11월 이 3부작의 첫 번째 앨범과 두 번째 앨범을 각각 선보였다. 이번 세 번째 앨범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작품 중 감정선이 가장 복잡하다고 평가받는 환상곡 C단조를 비롯해 독일 무곡 6개, 글라스 하모니카를 위한 아다지오, 작은 장례식 행진곡, 론도 A단조 등을 담았다. 론도 A단조는 백건우가 지난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생애 처음으로 만난 모차르트 작품”으로 언급한 곡이기도 하다.앨범 표지에는 모차르트 음악 해석의 열쇠를 아이다운 순수함에서 찾으려는 백건우의 바람이 반영됐다. 음반사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이번 3부작 앨범의 표지 그림을 공모했다. 그 결과 초등학교 3학년생인 이진형 군의 그림이 선정됐다. 백건우의 웃는 얼굴, 아래를 응시한 채 우수에 젖은 얼굴, 손가락을 얼굴에 올린 채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한 얼굴 등이 이진형 군의 그림으로 표현됐다.김동준 평론가는 앨범 내지에 담은 해설을 통해 “백건우는 이번 녹음을 통해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하기만 했을 뿐, 잘 알지 못했던 인간 모차르트의 초상화를 그려냈고 모차르트의 ‘사랑의 언어’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고 평가했다.앨범 발매에 맞춰 백건우는 이달부터 10월까지 ‘백건우와 모차르트’ 순회공연을 한다. 오는 8일 여수를 시작으로 밀양, 김포, 서울, 익산, 안동, 성남, 인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