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 년간 시장에 거대한 구조 변화가 일어났다. 적어도 표면상의 사건들은 이미 충분히 겪었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대표적이다. 지금도 부동산 가격은 상승하기만 하고 주가는 급등락을 반복한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빚을 내서라도 이 대열에 동참하려고 한다. 그저 때려잡거나 막으면 된다는 식으로만 생각하는 정책가가 많지만, 정작 그 본질은 무엇일까?

영국 크로스보더캐피털 설립자 마이클 하월은 《자본전쟁: 글로벌 유동성의 등장(Capital Wars: The Rise of Global Liquidity)》(2020년)에서 1980년대 이후 전개된 글로벌 유동성의 급증이 그 본질이라고 봤다. 글로벌 유동성은 거시경제에서 저축액과 신용 창조의 총합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구매력을 의미한다.

정의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 또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유동성 개념은 이미 증권사의 시장분석 보고서에서 늘 등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연간 약 80조달러인 데 비해 글로벌 유동성 규모는 130조달러에 달한다는 저자의 추정을 막상 접하고 나면, 몸통보다 꼬리가 두 배 가까이 커진 이 장세가 언제부터 왜 생겼으며 그 배후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진다.

19~20세기에도 글로벌 유동성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실물경제 대비 규모가 작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미국 달러화 공급 규모가 팽창한 이후 전례 없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20세기 후반 독일, 일본에 이어 21세기에는 대(對)중국 무역적자가 누적됐고 이 과정에서 세계 시장에 달러화 공급이 가속화됐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중국의 개방노선 채택과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도 큰 계기가 됐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사업 성장을 위한 신규 자금 조달보다 리파이낸싱(re-financing) 비중이 현저히 늘어났다. 기존 금융상품을 담보로 제공하거나 재포장한 환매조건부채권(Repo), 주택저당증권(MBS), 부채담보부증권(CDO),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과 같은 새로운 금융상품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담보자산 확보와 장단기 만기 합치가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둘째, 경기변동이 실물 요인보다 금융 요인에 더욱 좌우되기 시작했다. 대개 글로벌 유동성은 실물경기 순환에 몇 년 선행해서 나타나는데 상승장에는 위험자산, 하락장에는 안전자산으로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유동성 변동이 최대·최악으로 터진 것이 바로 2008년 금융위기였다.

이때 표준 경제학의 주장과 달리 금리 메커니즘은 거의 작동하지 않았고 유동성의 규모 자체가 관건이 됐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양적완화, 즉 유동성 공급 목적으로 채권을 대량 매입함으로써 대차대조표 규모가 무려 3조달러를 초과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금융의 의미는 이전 시대와 너무나 달라졌다. 월스트리트를 비롯해 주요국 금융회사들은 실물 부문에 기여하는 금융 본업보다, 비대해진 글로벌 유동성을 운용해 수익률을 올리려는 사업이 태반이 돼버렸다.

최근 미·중 대립은 단순한 무역분쟁을 넘어 자본전쟁이기까지 하다. 중국은 글로벌 가치사슬 권역 내에서 위안화 결제를 확대하고 위안화 표시 채무증권을 공급하면서 위안화 패권국 지위를 획득하려 해 왔다. 그 성공 여부는 미지수지만, 저자는 21세기 디지털 화폐가 촉발시킨 탈(脫)중앙화 추세가 이를 저지하는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사실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 상승도 단순히 부동산 수급 문제를 넘어 글로벌 유동성을 포함해 시중은행의 부동산담보대출과 전세자금 등 자생적 로컬 유동성이 크게 가세했다고 보인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실물경제 대비 과도한 글로벌 유동성에 기인한 시장 불안정성, 그리고 여기에 기인한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을 과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저자의 대안 제시가 부족한 점은 다소 아쉽지만, 이 과제는 글로벌 유동성 문제의 심각성을 바로 인식하는 정책가와 연구자의 몫이 돼야 할 것 같다.

송경모 <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