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두 동강 난 아메리카
‘인종의 용광로’ 소리를 듣던 미국이 파당 정치, 인종 갈등, 빈부 격차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으로 칭송받던 미국에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졌다.

공화와 민주 양당 간 타협의 정치는 실종되고 거부 민주주의(vetocracy·비토크라시)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상대 당을 증오하는 부정적 당파주의(negative partisanship)가 심화됐다. 공화당원의 50%, 민주당원의 3분의 1은 상대 당 집안과의 혼사를 원하지 않는다. 공화당은 백인, 부자, 보수 기독교인의 정당으로 변질됐다. 기존의 정치 관행이나 모럴을 거부하는 아웃사이더가 됐다. 연방정부 폐쇄, 국가채무한도 증액 반대와 같은 정치적 일탈을 주저하지 않는다. 부유층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포퓰리즘적 금권정치가 지배하는 정당이 됐다. 숀 해너티, 터커 칼슨이 앵커로 있는 극우 성향 폭스뉴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정체성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위한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조차 정치 양극화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 당파주의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최대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인종 갈등 문제가 최대 현안이 됐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전국적으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흑인의 인권, 사회적 지위, 구조적 차별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는 기회가 됐다. 뉴욕타임스와 시에나 칼리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당원의 89%는 시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공화당원은 36%에 불과하다. 인종, 종교조차 파당 정치와 깊이 연계돼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에두아르도 포터는 “인종차별은 미국의 원죄”라고 주장한다. 인종차별 이면에는 백인의 지위가 약화되는 것에 대한 분노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인종주의는 흑인을 재산으로 인식했던 백인 우월주의의 슬픈 유산이다.

차별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흑인은 상장기업 최고경영자의 3%에 불과하다. 코로나19 흑인 사망자는 백인의 2.4배에 달한다. 1000명당 확진자가 백인이 23명인 반면 흑인은 62명이나 된다. 같은 범죄에 대해서도 흑인은 20% 정도 높은 형량을 선고받는다.

‘빈곤이 범죄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빈부격차는 증오와 불신을 배양한다. 상위 1%가 소득의 20% 이상을 보유한다. 1980년 12%에서 급증했다. 하위 50%는 12%에 불과하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정책으로 법인세율이 35%에서 21%로 인하되고 사업소득세, 상속세도 크게 줄었다. 감세 혜택이 상위 1%에 집중됐다. 상위 1%는 상장주식의 50%를 보유해 증시 호황으로 엄청난 자본이득을 창출했다. 노조 가입률은 1983년 20.1%에서 2019년 10.3%로 낮아졌다. 1980년대 이후 근로자의 실질임금이 정체된 것은 노조 약화, 최저임금 인상 둔화 등과 관련이 깊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의 ‘절망의 죽음(death of despair)’은 근로계층의 애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45~54세 근로자의 사망률이 마약 복용, 알코올 중독, 자살로 급증했다.

교육 불평등도 심각하다. 상위 1%가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할 확률은 하위 20%의 77배나 된다. 상위 25% 자녀는 77%가 대학을 졸업하지만 하위 25%는 9%에 그치고 있다. “명문대에 입학하는 길은 우편번호(ZIP CODE)에 달렸다”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인종, 젠더 차별은 점차 개선된 반면 계급태생이라는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의 말처럼 21세기 미국은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사회”로 변질됐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갈등이 심화됐다. 분열과 분노의 정치는 백인 우월주의를 공고히 하고 정체성 정치를 촉발했다. 트럼프식 금권정치가 극심한 불평등과 결합하면서 국가 정체성이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대선은 조 바이든의 타협과 포용의 정치, 트럼프의 포퓰리즘에 대한 선택이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역설했다. 미국 유권자에게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