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위헌·무효인 긴급조치로 기소된 사람 권리구제 폭 넓혀줘야" 첫 판단
구속기소 돼 선고 직전 긴급조치 해제로 면소 판결…형소법상 재심 불가
법원 "긴급조치 해제로 면소, 재심사유 된다"…김덕룡 재심 개시
위헌·무효인 긴급조치 사건에 대해서는 형사소송법상 재심 대상이 아닌 '면소' 판결도 재심을 받을 수 있다는 첫 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 결정이 확정되면 박정희 유신정권에 저항하다가 구속기소 된 김덕룡(79)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의 재심이 41년 만에 개시된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20부(강영수 정문경 이재찬 부장판사)는 김 이사장이 재심 청구 기각에 불복해 낸 즉시항고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김 이사장은 1979년 신민당 총재이던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면서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백서를 발간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김 이사장은 앞서 1976년에도 김지하 시인의 시를 배포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법원은 1976년 선고된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대해서는 재심을 거쳐 무죄를 선고했지만, 1979년의 사건에 대해서는 김 이사장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차이는 두 사건의 결과가 달랐기 때문에 생겼다.

1976년 사건에서 김 이사장은 징역 10개월의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1979년 사건에서는 면소 판결을 선고받았다.

1979년 12월 15일 김 이사장의 1심 선고가 이뤄지기 꼭 1주일 전인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됐기 때문이다.

면소란 공소시효가 지났거나 범죄 후의 법령 개폐로 형이 폐지됐을 때 등 다른 이유로 형사소송을 종료하는 판결이다.

면소 판결의 경우 재심 대상이 되지 않는다.

형사소송법 제420조가 '유죄의 확정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79년 사건에 대한 김 이사장의 재심 청구는 올해 2월 기각됐다.

그러나 항고심 재판부는 "이 사안처럼 당초에 위헌·무효인 긴급조치 9호 해제로 면소 판결을 선고받은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재심 대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심하게 침해해 위헌성이 명백하므로, 이를 위반한 공소사실로 기소돼 재판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국가가 권리와 명예를 회복해 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에 따라 법원은 무죄판결을 선고해 그 사람의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고 선언해주고 명예가 실질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권리구제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면소는 법원이 실체 심리에 들어가지 않고 형사재판을 종결하는 형식재판"이라며 "피고인은 위헌·무효인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고 기소됐음에도 실체 심리를 통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직접적인 판단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긴급조치 해제라는 '우연한 사정'으로 인한 것으로, 이보다 앞서 유죄 선고를 받아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이들과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짚었다.

아울러 재판부는 무죄 판단을 받아야 마땅한 사건임에도 실체 판단을 받지 못한 만큼, 이에 대해 재심에서 무죄라고 밝혀주는 것은 '실질적 명예회복'이라는 법률상 이익이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런 이유로 긴급조치 9호의 면소 판결을 재심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권리구제의 폭을 넓히기 위한 적극적 법 해석의 일환"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예외적으로 이렇게 재심 대상 범위를 넓히는 해석은 법적 안정성을 해하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마련된 재심 제도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