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기부내역서, 성교육 수료증, 심리상담 자료, 봉사활동 증명서, 장기기증 서약서...검사가 구형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성범죄 가해자들이 반성문, 기부금 내역서, 봉사활동 증명서, 성교육 수강 자료, 심리상담 증명서 등 ‘양형 패키지’를 사법기관에 제출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면피용 양형 자료를 엄밀히 조사해 ‘솜방망이 처벌’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검거되거나 자수한 성범죄자들 중 상당수는 사법 기관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다수 여성을 상대로 성착취물 제작·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은 물론 ‘박사방’의 시초격인 ‘n번방’들 중 하나를 넘겨받은 ‘켈리’, n번방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고담방’의 운영자 ‘와치맨’ 등도 10차례 이상의 반성문을 제출했다.

피의자들의 반성문에는 감경을 받기 위해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이 주로 담겨있다. 법무법인에서 대필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최근에는 저렴한 가격을 강조하는 반성문 전문 대필업체도 나타나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 ‘반성문’을 검색하면 대필 업체들의 홍보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비용은 A4용지 3~5장당 5만원 수준이다.

이들은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성교육 강의도 챙겨 듣는다. 강의를 듣고 감상문을 제출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반성문, 성교육 감상문은 수십장 이상을 권하고 있다”며 “이른바 성범죄 전문이라고 하는 변호사들은 '이왕 심리 상담을 할 거면 정신과에서 하는 게 감형에 유리하다'는 권고까지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범죄 피의자들이 여성단체에 기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 역시 감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단체 관계자들은 이같은 기부자를 걸러내기 위해 고역을 겪고 있다. 특히 지난달에는 n번방 수사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세계 여성의 날’도 있어 여성단체 기부가 폭증했다. 단체의 활동가들은 성범죄 가해자들의 기부를 가려내기 위해 일일이 확인 작업을 하고 있다.

닻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가해자들이 후원계좌로 입금한 뒤 무통장입금 내역을 법원에 제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통장입금 후원도 막았다”며 “선의의 후원자들이 더 많이 있는데 하나하나 의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했다.

‘양형 패키지’의 등장은 일부 법관들이 이러한 양형 자료들을 양형기준상 감경요인인 ‘진지한 반성’으로 인정하고 있어서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선고된 1,2심 성폭력 사건 137건의 판결물을 자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총 48건(35%)에 '반성', '뉘우침'이 언급됐다. 그러나 ‘진지한 반성’의 근거 없이 법관들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 캡처.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 캡처.
이렇다보니 성범죄 감경요인에 반성 항목을 제외해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지난 3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는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한 성범죄의 형량 감경 요소 중 반성 항목을 제외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진지한 반성이라는 것은 너무나 해석의 여지가 많으며, 피해자를 향한 반성이라고 보기 힘든 부분도 많다”고 주장했다. 현재 9000여명이 동의한 상태다.

법조계에서는 진정성 있는 반성인지 양형조사 등을 통해 철저히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영미 변호사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중범죄 중심으로 양형조사가 이뤄진다”며 “n번방 사건을 계기로 향후 가해자 중심적 성범죄 양형기준을 재정비하고, 판결 전에도 양형조사관이 면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남영 기자 n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