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가 1000만~1500만 배럴 감산을 예상한다”고 밝히면서 국제 유가가 폭등했다. 감산 합의에 실패한 사우디와 러시아가 증산에 나서면서 배럴당 20달러 선이 깨질 위기에 처하자 개입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없던 초대형 감산 규모인 데다 “미국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혀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를 통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한 내 친구 MBS와 방금 얘기했다. 그들이 (원유) 약 1000만 배럴을 감산할 것으로 예상하고 희망한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석유·가스업계에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MBS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말한다. 트럼프는 또 다른 트윗에서 “(감산 규모가) 1500만 배럴에 이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트윗이 나온 뒤 서부텍사스원유(WTI)는 한때 35% 폭등했다. 사우디와 러시아의 ‘석유전쟁’이 끝날 것이란 기대감에서다. 다만 러시아 측이 “푸틴 대통령은 MBS와 대화하지 않았다”고 부인해 상승폭이 줄었다. WTI는 결국 전날보다 5.01달러(25%) 오른 배럴당 25.32달러, 브렌트유는 21% 상승한 배럴당 29.94달러에 거래됐다. WTI의 하루 상승폭 25%는 역대 최고 기록이다.

월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의심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거대한 감산을 위한 노력은 불신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증산 경쟁에 나선 건 지난달 7일 150만 배럴 감산에 합의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산유량의 10~15%에 달하는 하루 1000만~1500만 배럴 감산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에드워드 마셜 글로벌리스크매니지먼트 상품트레이더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사우디와 러시아가 하루 1000만 배럴을 감산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주도한다고 해도 엄청난 양이어서 모든 국가를 참여시키는 건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사우디는 이날 “시장을 안정시키는 공평한 합의를 이루기 위해 OPEC+(OPEC과 러시아 등 10개 산유국 협의체)와 다른 국가들이 모이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우디 당국자는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와 캐나다, 멕시코 등이 동참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모든 산유국이 함께 감산할 때만 참여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브리핑에서 “사우디와 러시아의 미국에 대한 감산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엑슨모빌 셰브런 등 미국 석유업계 메이저들이 이끄는 미국석유협회(API)는 이날 “미 정부가 국내 업계에 개입하기보다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달라”고 요구했다. 엑슨모빌도 “자유시장경제가 석유시장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발표했다.

원유 수요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급감해 막대한 감산이 이뤄져도 유가 하락세를 막는 데 큰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이미 각국 경제가 봉쇄되면서 하루 2000만 배럴이 남아돌고 있다. 블룸버그는 “코로나19로 인한 거대한 수요 감소를 극복하려면 감산 규모는 1000만 배럴보다 두세 배 커야 한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날 2020년 정부 예산을 유가 배럴당 20달러에 맞춰 재조정했다고 발표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