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 반미 군부 위축 불가피…"서방에 새로운 제안할 수도"
반서방 이란군부, 여객기 격추에 '타격'…협상파 힘얻나
변명의 여지 없는 민간 항공기 격추 사건으로 이란 군부가 상당히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이란 지도부에서 온건 성향의 대서방 협상파에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란은 기본적으로 군부의 영향력이 정치권뿐 아니라 경제계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사회다.

정부를 능가하는 이 권력의 중심에는 혁명수비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의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은 비록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되지만 최고지도자를 정점으로 한 신정일치 통치체제(이슬람 법학자 통치)에서는 다른 대통령제 국가에서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군부는 통수권자인 최고지도자의 권한을 떠받치는 기반으로, 이란의 보수세력의 핵심부다.

이란에서 보수파는 종교적이며 미국과 서방에 군사적, 이념적으로 저항하는 '혁명 정신'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현 정부를 이끄는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2013년 대선에서 중도로 분류되는 온건파와 개혁 성향 유권자의 지지를 받고 당선됐고 2017년 재선에 성공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미국과 핵합의를 벌여 제재를 완화해 이란 국민에게 경제적 이득을 되찾아 주겠다는 공약으로 표를 모았다.

최고지도자의 승인 아래 로하니 정부는 외교 계통을 온건 협상파로 교체하고 미국, 유럽과 핵협상을 벌여 2015년 7월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타결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핵합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등장으로 좌초 위기에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5월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이란 경제·금융 제재를 복원했기 때문이다.

반서방 이란군부, 여객기 격추에 '타격'…협상파 힘얻나
이후 로하니 정부의 입지는 좁아 들었다.

미국의 제재로 외국의 투자와 진출이 사실상 중단되고 이란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원유 수출도 극히 제한됐다.

서방과 적대적 관계를 개선해 실업난과 민생고를 해결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한 그는 보수파의 거센 공격을 받아야 했다.

보수파는 그를 미국에 속아 넘어갔다고 압박했다.

미국의 '최대 압박' 정책과 내부의 비판에 직면한 로하니 정부는 결국 지난해 5월부터 60일 간격으로 핵합의 이행범위를 줄이면서 유럽에 핵합의를 지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재를 피하려는 유럽은 핵합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암살과 이란의 미사일 보복으로 이란 국내의 반미 강경파의 목소리는 지배적인 여론이 됐다.

이 와중에 터진 혁명수비대의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사건은 이런 흐름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았다.

사상 처음으로 혁명수비대의 고위 장성이 국영방송 생중계를 통해 "모든 책임은 군에 있다"라며 사죄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미국의 일방주의와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핵합의를 지키고, 요인 암살에 비례대응했다는 피해자 입장의 명분으로 겨우 힘의 균형을 맞추던 이란의 방어벽이 순식간에 무너진 셈이다.

비록 의도적이 아니었다지만 민항기를 격추해 자국민을 포함해 176명을 죽게 한 이란 혁명수비대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했을 뿐 아니라 '수술대'에 오르게 될 전망이다.

군부의 영향력이 당분간 상당히 위축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명분까지 상실한 이런 상황에서 이란이 지금껏 고수한 대서방 강경 노선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국제 사회에서 더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요구하는 이른바 '새로운 핵합의'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겠지만 군부의 위축으로 온건·개혁파의 입지가 다소 넓어진 만큼 서방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휘발유 가격 인상 뒤 일어난 반정부 시위에서는 이란 군부가 유혈 진압했지만 이번에는 정부 비판 여론을 강경하게 억누를 수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테헤란의 한 정치평론가는 12일 연합뉴스에 "자의든, 타의든 이란은 책임을 신속히 인정했다"라며 "이런 태도는 매우 이례적인 모습으로, 이란 역시 이 격추 사건의 후폭풍을 매우 걱정한다는 뜻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이란 정부는 최악의 위기를 타개하고 국면을 전환하려고 굴복으로 보이지 않는 선에서 서방에 새로운 협상 제안을 할 수도 있다"라며 "현재 대외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기 어려워진 만큼 여객기 격추가 이란의 대외 정책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