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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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금값이 연일 급등세다. 중동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로 투자 자금이 금 시장으로 몰리고 있다. 국제 정세가 불안해지면 안전자산인 금의 가격이 뛴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쟁이 현실화할 경우에는 어떨까. 불안한 상황을 넘어 실제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금값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오르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꼭 그런 건 아니다. 최근 사례들을 살펴보면 예상외로 전쟁이 실제 일어났을 때는 금값이 크게 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90년대에 가장 주목받았던 전쟁인 걸프전 당시에는 오히려 금값이 떨어졌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전이 공식화했던 1990년 8월 온스당 411달러 수준이었던 금 현물 가격은 전쟁이 끝났던 1991년 2월 온스당 362달러 수준으로 떨어졌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는 국제 금값이 뛰기는 했지만, 평시와 비교해 상승률이 조금 더 높은 정도에 그쳤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던 2003년 3월 국제 금 시장에서 거래되는 금 현물 가격은 온스당 348달러대였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했던 2003년 5월에는 온스당 369달러대를 나타냈다. 전쟁이 진행되던 2달 동안 5.9%가량 뛴 것이다.

앞의 두 사례에서 전쟁이 실제 발발했음에도 국제 금값이 크게 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먼저 전쟁 발발이 이미 투자자들 사이에서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걸프전과 이라크 전쟁 당시 투자자들은 전쟁을 예상하고 금과 은 등 안전자산에 이미 많이 투자한 상태였다. 걸프전이 발발했던 1990년 8월에 온스당 411달러였던 금 현물 가격은 1985년의 온스당 290달러와 비교해 41%나 오른 것이었다. 이라크 전쟁 때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났다. 2001년 온스당 265달러대를 기록했던 금 현물 가격은 이라크 전쟁이 시작한 시기까지 약 2년간 31% 이상 뛰었다.

이른바 '페타 콩플리(Fait accompli·기정사실)'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페타 콩플리는 유럽의 전설적 투자자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처음 정의한 것으로 어떤 사건이 '확고한' 사실이 돼 더 이상 시세나 주가 등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 발발한 사실이 되레 시장의 불안감을 줄여주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나타났을 수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전쟁이 터질 듯 안 터질 듯 불안한 상황이 이어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 시장 측면에서는 더 안정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앞서 살펴본 두 사례에서는 모두 미국의 승리가 거의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투자자들을 덜 동요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정연일 기자 ne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