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통치는 지속 개선으로 혁명 방지하는 것"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앙드레 모루아 <영국사>
“요즘 영국은 브렉시트로 주목 받고 있지만,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다. 산업혁명을 태동시켰고, 근대사회의 양대 축인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최초로 정착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프랑스 지성 앙드레 모루아(1885~1967)의 <영국사>는 기원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2000여 년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고 있다. 단편적으로 들어온 사실들을 해박한 지식으로 촘촘히 엮어낸 끝에 그는 “영국 역사는 인간의 가장 뛰어난 성공의 기록”이라고 결론내린다.
'자유의 나라' 만든 힘은 '강한 함대'
문명이 발화하기 전 영국은 ‘짙은 안개에 쌓인 세계의 끝’ 쯤으로 인식됐다. <영국사>는 “고대와 중세인들은 영국을 오직 마귀만이 사는 먼 극지로 여겼다”고 썼다. 영국이 세계사에 등장한 것은 로마제국에 의해서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한 이후 약 5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침략에 당하기만 하던 영국은 4면의 바다를 지키는 ‘강한 함대’를 구축한 15~17세기 무렵부터 세계사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섬나라가 바다를 방위할 수 있게 되자 ‘상비 육군’이 불필요해져 군비가 절감됐고, 이는 정치제도 개혁 욕구를 분출시켰다. “침략에서 안전해지자 국민들은 거리낌 없이 자유를 요구했고, 군주들은 정치 안정에 주력할 수 있게 됐다.”
1588년 스페인 ‘무적 함대’ 격파로 확보한 해상 장악력은 대양을 넘나드는 상업과 해외무역망 구축으로 이어졌다. “18~19세기에 이르자 영국은 제국을 형성하고 유럽의 어떤 국민도 누릴 수 없었던 고도의 자유를 획득했다”는 게 <영국사>의 진단이다. ‘강한 함대’가 영국을 ‘자유가 태어난 나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왕권이 약화된 이유를 찾자면 로마시대로 거슬러가야 한다. 현지 관습과 문화를 존중했던 로마와 뒤이은 앵글로색슨 왕국의 1000년 지배는 ‘분권적 통치구조’를 낳았다. 이런 흐름이 ‘대헌장’(1215년) 체결로 이어졌다. 대헌장에는 왕의 일방적 세금 부과를 금지하는 조항도 포함돼 민간의 부(富)가 커지는 단초로도 작용했다.
모루아는 자유·자율에 대한 영국인들의 본능적 애착에 주목했다. “식민 국가에서 망명생활하는 사람도 그곳 통치에 참여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런 특성은 식민지 통치 때도 나타나 “통치는 피치자의 동의에 기초해야 하고, 통치자는 개선을 계속해 혁명을 방지하는 임무를 가졌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모든 의회의 어머니’로 불리는 영국 의회는 시민사회를 형성시키고, 영국이 ‘국민 국가’로 이행하는 역할을 해냈다. 폭정을 일삼던 제임스2세를 토리당과 휘그당이 합심해 퇴위시킨 명예혁명(1688년)이 주권을 궁정에서 의회로 이전시켰다. 의회는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고 권리장전(1698년)을 공포했다. 정기적인 의회 소집과 국가재정의 통제 권리가 의회에 있음이 명시됐다. 동의 없이 상비군을 둘 수 없다는 점도 천명했다. “명예혁명으로 ‘의회가 왕에 앞선다’는 원칙이 확립됐고 오늘날 보는 대로의 입헌군주제 모습이 갖춰졌다.”
명예혁명은 영국을 ‘상업 제국’으로 이끌었다. 의원 다수가 무역·상업에 투자한 지주여서 상공업 장려와 사유재산권 보장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의회는 안전한 국제거래를 위한 해군력 확보에 특히 많이 투자했고, 이는 18세기 영국이 해외무역을 확장하며 세계를 제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모루아는 반역이나 혁명을 거치지 않고도 변화를 모색해가는 지배엘리트층의 융통성을 높이 평가했다. 1차 대전 후 전문가들은 ‘대영제국 해체’를 예언했다. ‘자유’와 ‘제국’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변화 앞장선 의회가 '세계 제패' 기여
하지만 의회와 내각을 고안했듯이 영국은 1837년 캐나다에서의 반란을 계기로 ‘자유국가의 제국적인 연합’이라는 묘안을 이끌어냈다. 수개월 간의 현지 조사를 거쳐 “영국 왕은 자치령의 대의기관이 신임하는 사람을 통해 통치한다”는 혁명적인 결론을 내고 ‘반란파’에 내각 조직권을 내줬다. 국내 정치에서처럼 제국 내에서도 자율과 동의에 기초한 새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다.
모루아는 “영국의 진정한 힘은 타협의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2차 대전 후 인도가 더 이상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자 영국은 모든 관리와 주둔군을 철수시켰다. 모루아는 “현실과의 대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영국 정치의 참다운 역량”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사>가 2차 대전 직후 노동당 정부의 사회주의 정책을 긍정평가한 대목은 시대적 한계를 노출한 ‘옥에 티’다. 이후 탄광 철도 육상운송 가스 전기 민간항공을 차례로 국유화한 조치가 제국의 쇠락을 재촉했음을 이후 역사가 보여준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자유의 나라' 만든 힘은 '강한 함대'
문명이 발화하기 전 영국은 ‘짙은 안개에 쌓인 세계의 끝’ 쯤으로 인식됐다. <영국사>는 “고대와 중세인들은 영국을 오직 마귀만이 사는 먼 극지로 여겼다”고 썼다. 영국이 세계사에 등장한 것은 로마제국에 의해서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한 이후 약 5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침략에 당하기만 하던 영국은 4면의 바다를 지키는 ‘강한 함대’를 구축한 15~17세기 무렵부터 세계사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섬나라가 바다를 방위할 수 있게 되자 ‘상비 육군’이 불필요해져 군비가 절감됐고, 이는 정치제도 개혁 욕구를 분출시켰다. “침략에서 안전해지자 국민들은 거리낌 없이 자유를 요구했고, 군주들은 정치 안정에 주력할 수 있게 됐다.”
1588년 스페인 ‘무적 함대’ 격파로 확보한 해상 장악력은 대양을 넘나드는 상업과 해외무역망 구축으로 이어졌다. “18~19세기에 이르자 영국은 제국을 형성하고 유럽의 어떤 국민도 누릴 수 없었던 고도의 자유를 획득했다”는 게 <영국사>의 진단이다. ‘강한 함대’가 영국을 ‘자유가 태어난 나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왕권이 약화된 이유를 찾자면 로마시대로 거슬러가야 한다. 현지 관습과 문화를 존중했던 로마와 뒤이은 앵글로색슨 왕국의 1000년 지배는 ‘분권적 통치구조’를 낳았다. 이런 흐름이 ‘대헌장’(1215년) 체결로 이어졌다. 대헌장에는 왕의 일방적 세금 부과를 금지하는 조항도 포함돼 민간의 부(富)가 커지는 단초로도 작용했다.
모루아는 자유·자율에 대한 영국인들의 본능적 애착에 주목했다. “식민 국가에서 망명생활하는 사람도 그곳 통치에 참여하는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런 특성은 식민지 통치 때도 나타나 “통치는 피치자의 동의에 기초해야 하고, 통치자는 개선을 계속해 혁명을 방지하는 임무를 가졌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모든 의회의 어머니’로 불리는 영국 의회는 시민사회를 형성시키고, 영국이 ‘국민 국가’로 이행하는 역할을 해냈다. 폭정을 일삼던 제임스2세를 토리당과 휘그당이 합심해 퇴위시킨 명예혁명(1688년)이 주권을 궁정에서 의회로 이전시켰다. 의회는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고 권리장전(1698년)을 공포했다. 정기적인 의회 소집과 국가재정의 통제 권리가 의회에 있음이 명시됐다. 동의 없이 상비군을 둘 수 없다는 점도 천명했다. “명예혁명으로 ‘의회가 왕에 앞선다’는 원칙이 확립됐고 오늘날 보는 대로의 입헌군주제 모습이 갖춰졌다.”
명예혁명은 영국을 ‘상업 제국’으로 이끌었다. 의원 다수가 무역·상업에 투자한 지주여서 상공업 장려와 사유재산권 보장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의회는 안전한 국제거래를 위한 해군력 확보에 특히 많이 투자했고, 이는 18세기 영국이 해외무역을 확장하며 세계를 제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모루아는 반역이나 혁명을 거치지 않고도 변화를 모색해가는 지배엘리트층의 융통성을 높이 평가했다. 1차 대전 후 전문가들은 ‘대영제국 해체’를 예언했다. ‘자유’와 ‘제국’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변화 앞장선 의회가 '세계 제패' 기여
하지만 의회와 내각을 고안했듯이 영국은 1837년 캐나다에서의 반란을 계기로 ‘자유국가의 제국적인 연합’이라는 묘안을 이끌어냈다. 수개월 간의 현지 조사를 거쳐 “영국 왕은 자치령의 대의기관이 신임하는 사람을 통해 통치한다”는 혁명적인 결론을 내고 ‘반란파’에 내각 조직권을 내줬다. 국내 정치에서처럼 제국 내에서도 자율과 동의에 기초한 새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다.
모루아는 “영국의 진정한 힘은 타협의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2차 대전 후 인도가 더 이상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자 영국은 모든 관리와 주둔군을 철수시켰다. 모루아는 “현실과의 대결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영국 정치의 참다운 역량”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사>가 2차 대전 직후 노동당 정부의 사회주의 정책을 긍정평가한 대목은 시대적 한계를 노출한 ‘옥에 티’다. 이후 탄광 철도 육상운송 가스 전기 민간항공을 차례로 국유화한 조치가 제국의 쇠락을 재촉했음을 이후 역사가 보여준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