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미니앨범 '플로' 발표…"음악의 힘은 치유"
"30년 전 '담다디'는 고역의 추억…안식년 보내니 의욕"
이상은 "편안한 일상의 고마움, 느리게 살 때 행복감"
'쉼'의 시작은 '억지로'였다.

외동딸인 그는 충남 공주에 계신 아버지가 편찮아지자 본가로 내려갔다.

집안일을 거들다 보니 나라가 국정 농단 사태로 시끌벅적했다.

그런 상황에서 음반을 낼 수 없었다.

시골의 평온함에 '은퇴할까'란 유혹도 살짝 들었다.

음악과 거리감에 친숙해질 즈음, 고요를 깨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해, 오랜 팬의 편지를 읽고서다.

'언니는 유유자적하며 산다'란 글귀가 뇌리에 남았다.

좋은 뉘앙스였지만 '뭔가를 열심히 안 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구나'란 자각을 했다.

5년이 걸려 새 앨범 '플로'(fLoW)를 발표하는 싱어송라이터 이상은(49) 얘기다.

그는 지난해 데뷔 30주년도 딱히 기념하지 않았다.

팬들과 그해 3월 태국 여행을 다녀오고, 데뷔 일인 8월 제주에서 음악회를 연 게 전부다.

"휘게(Hygge·아늑함, 편안함을 뜻하는 덴마크어) 라이프를 오래 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요.

하하. 신곡 듣고 싶은 팬들에게 옛날 노래만 부르는 아티스트로 보이는 것도 부끄럽고요.

"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상은은 말에 꾸밈이 없었다.

"낯가림이 심하다" 했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화법이었고, "귀가 얇다" 했지만, 소신이 뚜렷했다.

이상은 "편안한 일상의 고마움, 느리게 살 때 행복감"
◇ '느림의 미학' 깃들어…이규호·강이채 등 편곡 참여
미니앨범에는 "흐르듯 산" 지난 다섯 해가 안긴 '느림의 미학'이 번져있다.

그는 흐르듯 노래했다.

자연스레 그의 오랜 음악 주제인 '치유'에 더 깊이 닿았다.

"사회 전체적으로 편안하지 않단 생각이 들었어요.

국정농단 등을 겪으며 사람들이 공통으로 스트레스를 겪었을 것이고, 저도 부모님이 편찮으셨고요.

편안한 일상에 대한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꼈죠."
그는 평소 행복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OECD 국가 중 우리가 자살률 1위란 건 사회 구조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것"이라고 느낀다.

테크놀로지 범람 시대, 새 노래가 스트레스받는 이들에게 "포근한 극세사 이불이 되길" 바랐다.

"사람은 원래 좀 느리고 느긋할 때 행복감이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
이상은 "편안한 일상의 고마움, 느리게 살 때 행복감"
첫 트랙 '릴랙스'(Relax)가 힐링의 문을 연다.

'릴랙스 릴랙스 릴랙스 내려놔 놓아'. 피아노 선율에 내려앉은 담백한 창법이 최면을 거는 주문 같다.

한 곡 한 곡 단비처럼 뿌리는 '토닥임'에 푸석한 마음이 촉촉해진다.

소박한 일상의 소중함('일상 노마드'), 희미해진 어른의 동심('가을 수채화'), 관계에서 다친 마음('플로')을 매만지는 손길이 능숙하다.

'웃어보는거야/ 행복은 내려놓을 때 오지'('넌 아름다워'), '오늘, 지금을/ 살면 잊혀져/ 언제나 지금 뿐이니까'('플로')….
'넌 아름다워'는 영국 솔 뮤지션 조 코커가 불러 유명해진 '유 아 소 뷰티풀'(You Are So Beautiful)처럼 가요에도 용기를 주는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만든 노래다.

그는 음악에도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도 경험한 치유의 힘이다.

고3 시절 야간 자율학습 시간 강당에 몰래 들어가 노래하며, 운동장 한가운데 누워 AFKN으로 팝을 들으며 숨통이 트이는 해방감을 느낀 기억이 있다.

위로를 떠안는 사운드는 '손맛'있는 편곡자들 덕에 '감칠맛'이 살았다.

전작인 15집 '루루'(2014)에선 '나 홀로' 편곡에 홈레코딩을 했다면, 이번엔 이규호, 강이채, 언니네이발관의 이능룡, 박성도가 편곡자로 참여했다.

이들은 전자 사운드나 바이올린, 만돌린 연주를 넣는 '재주'로 색채를 늘렸다.

그는 "모두 예상외 편곡이었다"며 "데모곡의 '키 프레이즈'(key phrase·핵심 멜로디 라인)를 살리고 각자 색깔을 더해 상상하지 못한 사운드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엔 내 음악을 장악하려 한 때도 있었는데, 상대에게 열어주니 아이디어가 섞여 훨씬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상은 "편안한 일상의 고마움, 느리게 살 때 행복감"
◇ '담다디' 무게 벗고 유랑…"문화 고수들에 영감 얻어"
근래 평범한 삶에 발을 붙였지만, '삶은 여행'이란 그의 노래처럼 이상은은 '노마드 아티스트'였다.

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대상을 받은 지 30여년. 전두환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6공화국이 출범하고, 88서울올림픽이 열려 사회가 약진하던 그해, 그는 단연 '핵인싸'(무리에서 아주 잘 지내는 사람이란 뜻)였다.

'선머슴' 같은 외모에 껑충한 키로 탬버린 춤을 추던 모습은 '문화 충격'이었다.

"록밴드 컬처클럽의 보이 조지를 좋아해 그 춤을 따라 춘 것이었죠. 하하."
그러나 이상은은 쏟아진 시선을 감당하지 못해 1991년 미국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담다디' 시절은 "방전된 에너지, 예민함을 자극하는 고통, 신경이 타들어 가는 고역의 추억"이다.

"MBTI(심리유형검사)로 보면 전 INFP(내향성이 강한 이상주의자 유형)예요.

사교적인 스타일이 아니어서 종일 고양이들과 놀죠. 그걸 모르고 ENFP(외향적이고 창의적인 유형)가 할 만한 길을 갔다가 '깨갱'한 거예요.

전, 제가 아니라 음악만 '핵인싸'가 됐으면 좋겠거든요.

하하."
이상은 "편안한 일상의 고마움, 느리게 살 때 행복감"
시끌벅적한 삶에서 탈출한 그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그런데 정작 뉴욕에서 음악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라디오를 틀면 나오는 트레이시 채프먼, 밥 말리, 수잔 베가 등 '다른 레벨' 음악에 "기절초풍할 것" 같았다.

점점 이젤에서 멀어졌다.

이곳에서 낸 3집(1991)부터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내 안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뉴욕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20대의 6년은 "음악 그 자체에 포커싱이 맞춰진" 시기다.

재일 교포 작가 강신자 씨와의 만남이 계기였다.

"제 3집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는 강신자 언니 말에 일본 구마모토현에 놀러 갔어요.

그분 댁에 스터디그룹이 있었는데, 이후 '크로스비트아시아'란 민간 문화 교류 운동도 펼쳤죠. 그곳에서 공연하고 앨범도 내며 언니 덕에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면서 온전히 음악에 스며들 수 있었어요.

"
그때 나온 결과물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10위에 꼽힌 6집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1995)다.

그는 자극을 주는 문화 고수들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강신자 씨를 비롯해 한양대 1학년 때 '담다디'를 만들어준 선배, 미국에서 3집 작업에 참여해준 편곡자가 '키 퍼슨'(key person)이다.

돌아보니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그는 30년 반환점을 돈 지금을 이렇게 비유했다.

쉼 없이 생산하던 토양도 휴작기가 있어야 영양소 풍부한 농작물을 길러낸다는 것.
"19살에 데뷔해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도 모르고 활동에 에너지를 다 빼앗겼어요.

그래서 음악을 일로 보는 시기도 있었죠. 안식년을 보내니 다시 의욕이 생겨요.

가족을 방치하다시피 살다가 부모님과 시간 보내며 '인생에서 중요한, 소소한 행복'도 깨달았고요.

더 좋은 생산을 하려면, 낙수처럼 떨어지는 작은 영감을 시원하게 마시려면 강박과 압박감 없이 느리게 보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