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abroad] 무작정 걸어도 괜찮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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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 반도와 콜로안섬
고백하건대 마카오는 꼭 가보고 싶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언젠가는 꼭 가볼 포르투갈 여행의 맛보기 같은 목적지였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이 정착하기 시작해 1999년 중국에 반환되기 전까지 100년 넘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에서는 쓰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포르투갈어가 여전히 공용어 중 하나다.
마카오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높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1㎢당 2만명이 넘는다.
좁고 사람 많기로 유명한 홍콩(6천700여명)의 세 배 정도다.
인구 밀도로 만만치 않은 서울(1만6천여명)에 살면서 체감하지 못했던 그 수치는 국제공항이 있는 타이파섬에서 마카오 반도로 넘어갔을 때 강렬한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겉보기에도 빽빽하게 집들이 들어차 있는 아파트와 너무 좁아 어두컴컴한 거리에 서서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마카오 전체 면적(30㎢)은 송파구(34㎢)보다 작다.
일단 걷기 시작하면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다.
무작정 걷다 만나는 도시의 모습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 화려한 세계유산의 뒷모습
마카오가 가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16세기 중반 이곳에 정착해 무역과 가톨릭 포교의 거점으로 삼은 포르투갈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에 올라있는 '마카오 역사지구'는 마카오 반도의 중심에 모여 있는 25개의 건축물과 광장 등을 하나로 묶은 것인데, 이 중 대부분이 포르투갈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명소는 1602∼1640년에 지어진 성 바울 성당의 유적(Ruins of St. Paul's)이다.
동아시아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대학이었던 성 바울 대학과 마터 데이 성당(성 바울 성당의 원래 이름)은 1835년 화재로 소실되고 성당의 전면부(파사드)와 지하실, 일부 벽면과 계단만 남아 있다.
계단은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파사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언제나 북적인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이 없는 기념사진을 찍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남들이 가는 대로 세나도 광장에서 예수회 기념광장을 거쳐 계단을 올라 성당에 이르는 길을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유적 동쪽 몬테 요새를 먼저 올랐다.
성 바울 대학과 마터 데이 성당, 몬테 요새는 모두 예수회의 건축물이다.
마카오 시내를 360도로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에서 본 성 바울 성당 유적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서울로 온 베를린 장벽의 일부처럼 양감 없는 널빤지 하나가 서 있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예수회 기념광장에서부터 화려한 파사드를 바라보며 엄청난 인파를 헤치고 계단을 올랐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언덕을 내려오다가 파사드의 남동쪽에 멈춰 서니 화려하게 장식된 파사드 뒤의 텅 빈 자리가 더욱 도드라졌다.
파사드 뒤로 들어가면 인파는 확 줄어든다.
철제 구조물이 받치고 있는 파사드의 뒷면은 초라하고, 성당이 있었을 자리는 하부 구조물 일부만 남아 있는 공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하의 천주교 예술 박물관과 묘실(Museum of Sacred Art and Crypt)까지 내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화강암 바위 위에 성 바울 대학 설립자인 알렉산더 발리냐노 신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유물이 있는 작은 묘실은 위에서 들어오는 빛과 소박한 십자가 하나가 서 있을 뿐인데 성스러운 예배당에서처럼 숙연해졌다.
작은 박물관에는 1835년 화재 당시 그을음조차 남지 않은 채 발견된 단 한 점의 작품이라는 천사장 미카엘 그림을 볼 수 있다.
◇ 길을 잃고 우연히 만난 것들
성 바울 성당의 유적 바로 옆에 또 다른 세계유산인 나차 사원과 구시가지 성벽을 지나 걷다 보니 도심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울창한 공원에 들어섰다.
키 큰 야자나무, 거대한 바위를 휘감으며 자란 나무뿌리가 이국임을 실감케 한다.
도시 곳곳에 있는 공원의 오후는 북적인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나 할머니, 웃통이든 신발이든 하나씩 벗고 맨손 체조든 배드민턴이든 운동을 하는 중년의 남성이 대부분이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한 동상 아래 모여 있는데 멀리서 봐도 도포에 갓을 쓴 것이 분명한 모습이다.
다가가 보니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성인이다.
김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운영하는 마카오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김 신부의 동상을 만나고 나서야 이곳이 까모에스 공원임을 알았다.
도포 위에 영대(領帶)를 걸치고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성 김대건의 동상은 큰 야자수에 둘러싸여 딱히 어울리지 않았다.
허약한 몸으로 언어도, 음식도, 날씨도 모든 것이 낯선 이국에서 외롭고 힘들었을 조선 유학생의 모습과 겹쳐졌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공원 입구 쪽 김대건 신부의 목상이 있다는 성 안토니오 성당까지 들렀으면 좋았으련만, 그건 뒤늦게야 알았고 무작정인 발길은 인적 드문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포르투갈어, 성당이나 서양식 건물 대신 한자와 사찰을 보고 지금은 어쨌든 중국 땅이라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성 바울 성당 앞 계단의 유적만큼이나 사람이 많은 어묵 골목 인근에서 만난 로우카우 맨션은 세나도 광장과 대성당, 성 도미니크 성당 등이 밀집해 있는 '크리스천 도시'의 중심에서 오히려 '튀는' 문화유산이다.
1889년경 지어진 이 고급 저택은 중국의 부유한 사업가 로우카우 가족의 거주지다.
청회색 벽돌로 지은 이층집으로, 청 왕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에 서양식과 지역색이 가미됐다.
◇ 마카오 유일의 예술 박물관
인구 밀도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 마카오에서도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있다.
먼저 역사지구를 벗어나 마카오 반도의 동남부 세 당구 지역으로 갔다.
매립지인 이곳은 역사지구와 달리 반듯한 도로에 고층 빌딩이 들어선 오피스 타운이다.
그 끝에 공연장인 마카오 문화센터와 미술관인 예술 박물관, 마카오 반환을 기념해 중국 각 성에서 보낸 선물을 모아놓은 반환기념 박물관, 과학관 등이 모여 있다.
평일 오전의 오피스타운 거리는 한산했고, 막 문을 연 예술 박물관도 조용했다.
마침 마카오 반환 20주년을 기념해 6∼10월 열리는 대규모 예술·문화 행사 '아트 마카오'를 앞두고 사전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마카오 태생의 화가가 수채물감으로 그린 마카오 곳곳의 모습은 어제 본 마카오를 다른 색깔로 보여줬고, 중국 유일의 국가 미술관인 중국미술관(NAMOC)에서 온 90여점의 근현대 미술 작품도 신선했다.
또 다른 전시관에서는 영국 박물관에서 온 르네상스 시대의 드로잉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비록 손바닥보다 작은 소품이긴 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인파에 떠밀리지 않고, 소음이 없는 곳에서, 힘들면 쉬었다가 찬찬히 즐길 수 있는 사치가 여기 있었다.
◇ 한가로운 어촌 마을의 원조 에그타르트
마카오 반도 아래 두 개의 섬, 타이파와 콜로안은 그 사이를 매립해 거의 하나의 섬이 됐다.
두 섬의 첫 글자를 딴 매립 지역 코타이가 현재 마카오를 지탱하는 고급 카지노 리조트 단지다.
반도 도심에서 버스를 타면 다리를 건너 콜로안섬까지 갈 수 있다.
콜로안섬은 영화 '도둑들'과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토요일 오전에 찾은 섬은 아직 한적했다.
카지노 관광객이나 홍콩에서 하루 이틀 일정으로 들르는 관광객이 많다 보니 굳이 찾기에는 먼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은 어촌 마을을 찾게 하는 이유라면 30년 전 마카오에서 처음 문을 연 에그타르트 가게 '로드 스토우즈'다.
코타이의 고급 호텔에도 지점이 있지만 '원조'를 찾는 사람들 덕에 작은 어촌 마을이 북적인다.
작은 블록 하나에 로드 스토우즈 매장이 세 곳이나 있지만 따끈한 타르트 하나를 들고 방파제에 철퍼덕 주저앉는 것이 콜로안의 한가로움을 만끽하기에는 제격이다.
오후 비행기 시간에 맞추느라 맛있지만 이 동네에선 꽤나 비싼 핸드드립 커피 한잔으로 콜로안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아쉽게 끝냈다.
조금 더 시간이 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반대쪽 검은 모래로 유명한 학사 비치까지 느긋하게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
고백하건대 마카오는 꼭 가보고 싶지만 아직 가보지 못한, 언젠가는 꼭 가볼 포르투갈 여행의 맛보기 같은 목적지였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인이 정착하기 시작해 1999년 중국에 반환되기 전까지 100년 넘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에서는 쓰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포르투갈어가 여전히 공용어 중 하나다.
마카오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높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1㎢당 2만명이 넘는다.
좁고 사람 많기로 유명한 홍콩(6천700여명)의 세 배 정도다.
인구 밀도로 만만치 않은 서울(1만6천여명)에 살면서 체감하지 못했던 그 수치는 국제공항이 있는 타이파섬에서 마카오 반도로 넘어갔을 때 강렬한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겉보기에도 빽빽하게 집들이 들어차 있는 아파트와 너무 좁아 어두컴컴한 거리에 서서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마카오 전체 면적(30㎢)은 송파구(34㎢)보다 작다.
일단 걷기 시작하면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다.
무작정 걷다 만나는 도시의 모습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 화려한 세계유산의 뒷모습
마카오가 가진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16세기 중반 이곳에 정착해 무역과 가톨릭 포교의 거점으로 삼은 포르투갈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에 올라있는 '마카오 역사지구'는 마카오 반도의 중심에 모여 있는 25개의 건축물과 광장 등을 하나로 묶은 것인데, 이 중 대부분이 포르투갈의 영향 아래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대표 명소는 1602∼1640년에 지어진 성 바울 성당의 유적(Ruins of St. Paul's)이다.
동아시아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대학이었던 성 바울 대학과 마터 데이 성당(성 바울 성당의 원래 이름)은 1835년 화재로 소실되고 성당의 전면부(파사드)와 지하실, 일부 벽면과 계단만 남아 있다.
계단은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파사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언제나 북적인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이 없는 기념사진을 찍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남들이 가는 대로 세나도 광장에서 예수회 기념광장을 거쳐 계단을 올라 성당에 이르는 길을 생각하고 출발했지만, 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유적 동쪽 몬테 요새를 먼저 올랐다.
성 바울 대학과 마터 데이 성당, 몬테 요새는 모두 예수회의 건축물이다.
마카오 시내를 360도로 내려다볼 수 있는 이곳에서 본 성 바울 성당 유적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서울로 온 베를린 장벽의 일부처럼 양감 없는 널빤지 하나가 서 있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예수회 기념광장에서부터 화려한 파사드를 바라보며 엄청난 인파를 헤치고 계단을 올랐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언덕을 내려오다가 파사드의 남동쪽에 멈춰 서니 화려하게 장식된 파사드 뒤의 텅 빈 자리가 더욱 도드라졌다.
파사드 뒤로 들어가면 인파는 확 줄어든다.
철제 구조물이 받치고 있는 파사드의 뒷면은 초라하고, 성당이 있었을 자리는 하부 구조물 일부만 남아 있는 공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하의 천주교 예술 박물관과 묘실(Museum of Sacred Art and Crypt)까지 내려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화강암 바위 위에 성 바울 대학 설립자인 알렉산더 발리냐노 신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유물이 있는 작은 묘실은 위에서 들어오는 빛과 소박한 십자가 하나가 서 있을 뿐인데 성스러운 예배당에서처럼 숙연해졌다.
작은 박물관에는 1835년 화재 당시 그을음조차 남지 않은 채 발견된 단 한 점의 작품이라는 천사장 미카엘 그림을 볼 수 있다.
◇ 길을 잃고 우연히 만난 것들
성 바울 성당의 유적 바로 옆에 또 다른 세계유산인 나차 사원과 구시가지 성벽을 지나 걷다 보니 도심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울창한 공원에 들어섰다.
키 큰 야자나무, 거대한 바위를 휘감으며 자란 나무뿌리가 이국임을 실감케 한다.
도시 곳곳에 있는 공원의 오후는 북적인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나 할머니, 웃통이든 신발이든 하나씩 벗고 맨손 체조든 배드민턴이든 운동을 하는 중년의 남성이 대부분이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한 동상 아래 모여 있는데 멀리서 봐도 도포에 갓을 쓴 것이 분명한 모습이다.
다가가 보니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성인이다.
김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운영하는 마카오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다.
김 신부의 동상을 만나고 나서야 이곳이 까모에스 공원임을 알았다.
도포 위에 영대(領帶)를 걸치고 한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성 김대건의 동상은 큰 야자수에 둘러싸여 딱히 어울리지 않았다.
허약한 몸으로 언어도, 음식도, 날씨도 모든 것이 낯선 이국에서 외롭고 힘들었을 조선 유학생의 모습과 겹쳐졌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공원 입구 쪽 김대건 신부의 목상이 있다는 성 안토니오 성당까지 들렀으면 좋았으련만, 그건 뒤늦게야 알았고 무작정인 발길은 인적 드문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포르투갈어, 성당이나 서양식 건물 대신 한자와 사찰을 보고 지금은 어쨌든 중국 땅이라는,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성 바울 성당 앞 계단의 유적만큼이나 사람이 많은 어묵 골목 인근에서 만난 로우카우 맨션은 세나도 광장과 대성당, 성 도미니크 성당 등이 밀집해 있는 '크리스천 도시'의 중심에서 오히려 '튀는' 문화유산이다.
1889년경 지어진 이 고급 저택은 중국의 부유한 사업가 로우카우 가족의 거주지다.
청회색 벽돌로 지은 이층집으로, 청 왕조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에 서양식과 지역색이 가미됐다.
◇ 마카오 유일의 예술 박물관
인구 밀도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 마카오에서도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당연히 있다.
먼저 역사지구를 벗어나 마카오 반도의 동남부 세 당구 지역으로 갔다.
매립지인 이곳은 역사지구와 달리 반듯한 도로에 고층 빌딩이 들어선 오피스 타운이다.
그 끝에 공연장인 마카오 문화센터와 미술관인 예술 박물관, 마카오 반환을 기념해 중국 각 성에서 보낸 선물을 모아놓은 반환기념 박물관, 과학관 등이 모여 있다.
평일 오전의 오피스타운 거리는 한산했고, 막 문을 연 예술 박물관도 조용했다.
마침 마카오 반환 20주년을 기념해 6∼10월 열리는 대규모 예술·문화 행사 '아트 마카오'를 앞두고 사전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마카오 태생의 화가가 수채물감으로 그린 마카오 곳곳의 모습은 어제 본 마카오를 다른 색깔로 보여줬고, 중국 유일의 국가 미술관인 중국미술관(NAMOC)에서 온 90여점의 근현대 미술 작품도 신선했다.
또 다른 전시관에서는 영국 박물관에서 온 르네상스 시대의 드로잉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비록 손바닥보다 작은 소품이긴 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인파에 떠밀리지 않고, 소음이 없는 곳에서, 힘들면 쉬었다가 찬찬히 즐길 수 있는 사치가 여기 있었다.
◇ 한가로운 어촌 마을의 원조 에그타르트
마카오 반도 아래 두 개의 섬, 타이파와 콜로안은 그 사이를 매립해 거의 하나의 섬이 됐다.
두 섬의 첫 글자를 딴 매립 지역 코타이가 현재 마카오를 지탱하는 고급 카지노 리조트 단지다.
반도 도심에서 버스를 타면 다리를 건너 콜로안섬까지 갈 수 있다.
콜로안섬은 영화 '도둑들'과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토요일 오전에 찾은 섬은 아직 한적했다.
카지노 관광객이나 홍콩에서 하루 이틀 일정으로 들르는 관광객이 많다 보니 굳이 찾기에는 먼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은 어촌 마을을 찾게 하는 이유라면 30년 전 마카오에서 처음 문을 연 에그타르트 가게 '로드 스토우즈'다.
코타이의 고급 호텔에도 지점이 있지만 '원조'를 찾는 사람들 덕에 작은 어촌 마을이 북적인다.
작은 블록 하나에 로드 스토우즈 매장이 세 곳이나 있지만 따끈한 타르트 하나를 들고 방파제에 철퍼덕 주저앉는 것이 콜로안의 한가로움을 만끽하기에는 제격이다.
오후 비행기 시간에 맞추느라 맛있지만 이 동네에선 꽤나 비싼 핸드드립 커피 한잔으로 콜로안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아쉽게 끝냈다.
조금 더 시간이 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반대쪽 검은 모래로 유명한 학사 비치까지 느긋하게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