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9일 대법원 선고에서 2심 파기환송 선고를 받은 가운데 삼성 내부에선 "그룹 안팎으로 위기인 만큼 이 시기를 잘 극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재판을 TV로 지켜본 후 "(대외적 위기에) 흔들림 없이 잘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에 대한 재판과 별개로 전 계열사 경영진들이 합심해 일본의 수출규제 등 대외환경 악화에 만반의 준비를 해달라는 취지다.

대법원 선고 이튿날인 30일 이 부회장은 집무실 중 한 곳인 삼성 서초사옥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삼성 관계자는 "최근에는 수원 본사 집무실이나 한남동 개인 사무실로 더 자주 간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전날에도 사무실로 출근하는 대신 모처에서 평상시대로 업무를 보면서 TV 생중계로 재판을 지켜봤다. 2심 파기환송 선고가 나오자 짧게 한숨을 쉰 것으로 전해졌다.

파기환송 선고로 이 부회장이 당장 구속되는 것은 아니므로 거취에 변화는 없지만, 또 다시 장기간 재판을 준비해야 해 경영 불확실성 확대는 불가피하다. 법조계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파기환송심까진 3~4개월이 걸리지만 재상고 이후 대법원 판결을 다시 받는 기간까지 포함하면 이 부회장의 최종 선고까지는 약 1년이 걸릴 전망이다.

미·중 무역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 등 대외적인 경영 악재가 산적해 있는 만큼 분위기가 과거와 사뭇 다르다는 게 내부 관계자 전언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경영진들에게 재판 이슈와 별개로 일본의 수출규제와 관련해 전 계열사가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안다"며 "그만큼 현재 대외적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삼성은 전날 이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끝난 뒤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삼성은 2016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태' 3년여 동안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기소, 1심 실형 판결, 2심 집행유예 판결 등 주요 사안에도 공식 입장을 한번도 밝힌 적이 없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 오너 재판 이슈가 최우선 순위였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달라진 분위기"라며 "지금의 대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예 도태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다"고 했다.

삼성은 최악의 대외적 경영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관세 전쟁'이 치열한 데다 자국 기업을 감싸기 위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일 '삼성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 지난 28일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전격 시행했다.

삼성전자의 주력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삼성전자 영업이익의 75%(지난해 기준)를 차지하는 반도체 부문은 올해 2년여 만에 최악의 성적표가 예상된다. 디스플레이도 중국의 저가 공세에 출구전략을 세워야 한다. 애플은 최근 삼성에 독점 공급받던 모바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물량을 중국 BOE로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 부회장이 당장 이번 주말부터 공개적인 경영행보를 재개할지도 관심사다. 이 부회장은 작년 2월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현장경영에 나선바 있다.

올해 들어서도 미중 무역분쟁과 일본 수출규제 사태가 터지자 잇따라 긴급 사장단회의를 주재하면서 비상경영을 이끌었다. 최근에는 충남 온양·천안 반도체 사업장(6일), 경기도 평택사업장(9일), 광주 가전사업장(20일), 삼성디스플레이 충남 아산사업장(26일) 등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