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종이·책·한지로 꾸민 생명력…한국적 팝아트의 새 지평 열다
이씨는 “종이나 고서(古書)는 지식을 전달하던 본질에서 자유로워져 하나의 선(線)이 되고 색(色)이 되는 것”이라며 “시간과 사건이 쌓여서 역사를 만들 듯이 그런 과정을 겪으며 작품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중앙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이씨는 지난 20년 동안 주로 프랑스 인상파 거장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자화상을 비롯해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의 명화를 주제로 작업해 왔다. 한국적 팝아트에 매달린 30대 초반부터 ‘종이 입사(入絲)기법’의 독창성으로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모나리자’와 해바라기, 붓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흡사 나뭇결이나 태고의 신비로부터 비롯된 지층을 떼어낸 듯 관람객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축적된 종이 작업에 더해 황토로 여백을 메워 흙과 물감 냄새로 화면을 정제했다. 세부적인 묘사를 과감히 제거해 단순화하는 방식에다 조선시대 대중미술 민화 정신도 버무렸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수작업의 뚝심과 인내심도 간과할 수 없다. 매일 10시간 이상 작업실에서 크고 작은 종이를 일일이 쌓아 미묘한 변화를 줘 명상적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잔잔한 반전의 연속이다. 이씨는 “어떤 종이는 지질(紙質)의 특성상 가공·건조 과정에만 6개월이 걸린다”며 “비슷하지만 종이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작품마다 다른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유명 화가의 이미지를 패러디한 창작 방법 때문에 그에게 ‘팝아티스트’라는 예칭이 따라붙지만 자신의 가치관이나 이념을 그림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사실주의 미학으로도 읽힌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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