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20년 전부터 바이오사업을 준비했다. 1999년 삼성종합기술원에 ‘바이오랩’을 세우고 연구자 100여 명을 영입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2010년 발표한 ‘비전 2020’에서 바이오를 5대 신수종사업으로 지목했다. 이듬해 인천 송도에 의약품 위탁생산업체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했고, 뒤이어 복제약과 신약을 만드는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출범시켰다.

순항하던 삼성의 바이오사업은 2016년 한 정치인과 시민단체가 제기한 ‘분식회계’ 의혹에 급제동이 걸렸다. 2018년엔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가 본격화했다. 경영 공백에 삼성의 바이오사업은 사실상 멈춰 섰다. 재계의 한 원로는 “삼성의 20년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며 “대한민국이 바이오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흘러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삼성전자 직원들이 경기 화성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클린룸에서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직원들이 경기 화성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클린룸에서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의 5년 뒤가 걱정된다”

삼성의 수익 기반이 급속도로 흔들리고 있다. 여기엔 주력 사업과 미래 사업의 구분이 없다. 검찰 수사, 일본의 대(對)한국 소재 수출규제 등 외부 요인에다 혁신 부재, 목표의식 약화, 비전 실종 등의 내부적 요인이 더해진 결과다. “지금 씨를 뿌려야(투자해야) 5~10년 뒤 먹고사는데, 삼성은 2~3년 전부터 씨를 뿌리지 못하고 있다”(삼성 사장급 임원)는 우려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꾸준히 미래 먹거리에 관심을 가져왔다. 미국 실리콘밸리 출신 데이비드 은 사장과 손영권 사장을 전면에 내세워 각각 혁신, 신성장산업 발굴을 맡겼다. 작년 8월엔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4대 미래성장사업을 선정하고 18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올 4월엔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 전략을 발표했다.

이 부회장의 고군분투에도 삼성의 신사업이 틀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은 ‘외풍’ 영향이 크다는 진단이 나온다. 바이오사업은 ‘분식회계’ 의혹에 발목 잡힌 지 오래다. 바이오 계열사 대표(CEO)들의 검찰 소환과 구속영장 청구 소식이 외신에 긴급 타전되며 삼성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경영진의 잇단 소환 때문에 삼성바이오로직스가 10조원을 들여 송도에 지으려던 5공장 신설 계획은 잠정 보류됐다. 2017년부터 2년 연속 흑자를 내며 희망을 보였던 삼성의 바이오사업이 “좌초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지금 씨 뿌려야 5년 뒤 먹고사는데"…삼성바이오 '외풍'에 발목
‘제2의 글로벌파운드리’ 될까 우려

시스템반도체는 삼성을 타깃으로 한 일본 정부의 ‘핀셋 수출규제’로 손발이 묶여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일부터 삼성 시스템반도체 공정에 꼭 필요한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삼성이 세계 2위(점유율 19.1%)까지 치고 올라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에 비상등이 켜졌다. 퀄컴 엔비디아 등 고객사는 삼성에 생산을 맡긴 반도체를 제때 공급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삼성 내부엔 ‘삼성전자가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제2의 글로벌파운드리(GF)가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GF는 미국 파운드리업체로 한때 세계 2위까지 올라섰지만 재무 압박에 급격히 무너졌다. 급기야 작년 8월엔 “7㎚(1㎚=10억분의 1m) 초미세 공정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전자, 대만 TSMC와의 경쟁에서 백기를 든 것이다. 전직 삼성 사장은 “GF의 사례는 잘나가던 기업도 자칫 잘못하면 ‘영원한 2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경고했다.

현실 안주…“무리하지 말자”

메모리반도체, 스마트폰 등 삼성의 주력 사업은 업황 부진이란 벽에 갇혀 있다. 지난 2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6조5000억원, 잠정치 기준)은 전년 동기 대비 반토막(-56.3%) 났다.

실적 개선의 돌파구는 ‘혁신 제품’이란 것을 삼성도 잘 알고 있지만 여러 가지 내부적 요인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평가가 재계에서 나온다. 삼성 계열사 사장을 지낸 한 원로는 실적이 뒷걸음질치는 이유로 ‘1등병에 걸린 삼성’을 꼽았다. 이 원로는 “삼성 직원들이 ‘중간만 해도 현재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의 한 직원은 “배터리 폭발로 곤욕을 치른 갤럭시노트7 사태 이후 ‘무리해서 혁신 제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황정수/고재연/좌동욱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