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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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숙 인텔코리아 대표(55)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인텔코리아의 첫 번째 여성 마케팅본부장(상무), 첫 번째 여성 영업 담당 임원(전무), 그리고 지금은 첫 여성 대표를 맡고 있다. 인텔코리아에서 본사 부사장(영업마케팅그룹)에 선임된 것도 그가 처음이다.

정보기술(IT)업계에서 인문계 출신이자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깨온 권 대표를 지난 18일 만났다. 그의 오랜 단골집인 서울 강남구 수서동 ‘만강’ 수서점에서다. “경기 분당 야탑에 있는 본점에 들러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는데 수서점에는 회사 고객을 모시고 자주 온다”고 했다.

갓김치, 꼬막무침, 토란무침 등 전라도 향취가 가득한 밑반찬과 덕자회가 테이블에 올랐다. 30㎝가 넘는 큰 병어를 가리키는 덕자는 6, 7월이 제철이다. 봄동에 회 한점, 특제 기름장, 갈치속젓, 부추무침, 밥을 곁들여 싸먹는다. 지방이 풍부해 고소한 회와 갈치속젓의 조화는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별미다.

순둥이 신입사원, 현장에 던져지다

권 대표는 연세대 영문학과 82학번이다. 학부시절 연세어학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 친구들이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명숙이 너 정말 깬다(의외다)’예요. 그땐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고 조용한 학생이었거든요. 그런 제가 영업에, 대표까지 맡아 조직을 이끌고 있으니 친구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대단한 반전이죠(웃음).”

권 대표는 1986년 대우통신 대졸 여사원 공채 1기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첫 부서는 영업기획이었다. 자리에서 기획안을 만지던 어느 날 부서장이 불렀다. “책상에서 무슨 영업기획을 하나? 현장을 알아야지.” 부서장은 상품목록 책자를 내주며 “팩시밀리를 팔고 오라”는 미션을 줬다.

인천의 공업단지로 나왔지만 내성적이라 “안녕하세요”라고 인사조차 하기 힘들었다. “매일 업무일지를 쓰던 시절이었어요. 일지를 채우려면 뭐라도 해야 했죠.” 용기를 내 고객에게 다가가고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기 위해 매 순간 궁리하던 날들이다. 팩시밀리를 겨우 팔기 시작하자 부서장은 재고도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신입사원 권명숙이 ‘순둥이’ 껍질을 벗고 나온 때다.

마케팅과 고객 관리에 눈을 뜨던 1988년, 막 문을 연 인텔 한국지사에서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당시 잘나가는 대기업의 안락함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능성이 큰 회사’라고 판단하자 도전욕구가 생겼다. 인텔코리아가 조직을 갖춰가는 시기여서 배울 게 많을 것으로 기대했다.

IT업계 유리천장을 깨다

권 대표의 커리어는 사회통념에 맞선 도전으로 가득 차 있다. “여자가 어떻게 본부장을 해?”라는 생각이 파다했던 1990년대 후반, 인텔코리아의 마케팅본부장을 맡았다. 인터넷과 PC가 본격 보급되던 때다. 인텔코리아가 참여해 PC를 제조하는 중소기업 몇 곳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더 저렴한 가격의 상품을 내놓으면서 한국 내 PC 보급률이 획기적으로 올라갔다. 중소기업도 PC 시장에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인텔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한국 소비자의 인지도는 유독 낮았다. 세계에 똑같은 광고를 내건다는 것이 인텔 본사의 방침이었으나 승부수가 필요했다.

그는 본사 허가를 받아 서울의 주요 지하철 노선 차량을 인텔 중앙처리장치(CPU) 광고로 도배하다시피 하는 래핑광고를 했다. ‘CPU는 PC의 두뇌’라는 메시지는 지하철을 타고 고객의 마음을 두드렸다. 인텔과 CPU의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케팅 능력을 인정받고 보니 이번엔 영업에 욕심이 생겼다. 조직 최고 자리에 오르려면 ‘최전방 경험’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수차례 자원했지만 계속 반려됐다. 회사 안팎에서 ‘남자들이 도맡고 있는 영업에 여성이 오면 불편하다’는 기류가 강했다. “일단 기회를 달라. 실적을 내지 못한다면 그만두겠다”며 강수를 둬 2005년 영업 담당 전무가 됐다.

성과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글로벌 인텔 직원 중 의미있는 도전과 성과를 거둔 이에게 주는 최고상인 ‘IAA(Intel Achievement Award)’를 두 번이나 받았다.

권 대표는 덕자회와 함께 나온 민어전을 권하며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딸이 다섯 살 되던 때부터 엄마가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얘기해줬어요. 아이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저의 진정성은 전달되길 바랐죠.”

영업 담당 전무 다음 자리를 고민하던 때 미국 본사에서 근무할 기회가 왔다. 딸이 언제든 엄마를 찾으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 고사했다. 마침 삼성SDI에서 러브콜을 보내 2011년부터 4년간 마케팅 상무를 지냈다.

‘삼성의 치열함’을 이식 중

몸통 부위를 회 뜬 덕자의 나머지 부위는 조림으로 나왔다. 국물이 진하고 시원했다. 권 대표가 ‘소맥(소주와 맥주를 섞은 것)’을 두어 잔 돌렸다. “술은 아주 조금 한다”고 했으나 내공(?)이 느껴졌다.

2015년 인텔은 권 대표를 다시 불러들였다. 인텔코리아 대표직과 함께 본사 부사장 직함이 주어졌다. 삼성에서의 4년은 그에게 소중한 자산이 됐다.

“처음 인텔을 다닐 때는 인텔이 PC CPU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객 중심 서비스와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중점을 두는 분위기였죠. 삼성SDI에서 소형전지 마케팅을 했는데 역시 시장 1등이었어요. 하지만 2위인 일본 업체를 간발의 차이로 앞선 상황이어서 ‘조금만 실수해도 1위를 뺏긴다’는 절박함과 치열함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치열함은 인텔코리아를 이끄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인텔은 기존의 PC 중심 사업에서 데이터 기업으로 변신하고 있어요. 우리가 새롭게 진출하는 시장에는 많은 경쟁자가 있습니다. 인텔은 후발주자예요. 삼성에서 익힌 절박함과 치열함이 필요합니다.”

권 대표는 이런 인텔에서 여성이자 인문계 전공자라는 조건이 약점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시장에서 기술만으로 판매하려는 사람은 하수예요. 고객이 원하는 것, 해결하고 싶어하는 문제를 파악해 어떻게 가치를 더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 기술로 구현해서 고객의 선택을 받아야죠. 여성이자 인문계 출신이기에 기존 IT업계 사람들보다 두 배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기술적인 부분은 남보다 두 배 더 노력해서 익힌다고 했다. 인텔의 차별화된 기술을 소비자에게 자신의 언어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작년에 5세대(5G) 이동통신 기술을 ‘열공’했다. 어지간한 기술직 직원만큼은 알게 됐다고 자부한다.

인텔은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에지컴퓨팅 관련 솔루션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5G 시대를 맞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분야다. 그는 “5G 관련 사업자, 제조사와 함께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고민하고 있다”며 “이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로 5G 생태계를 키워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성 후배들에게 기회 넓혀주겠다”

권 대표가 꼽은 롤모델은 앤디 그로브 전 인텔 회장이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접고 CPU에 집중한다’는 결정을 내려 인텔의 성장을 주도한 인물이다. 요즘 인텔이 또 다른 새 분야에 도전하고 있어 그로브 전 회장의 과감하고 객관적인 결정을 되새긴다고 했다.

“그로브 전 회장은 생전에 한국에 오면 가방도 직접 들 정도로 의전을 전혀 받지 않으셨죠. 참석한 행사가 끝나면 직원들과 맥주 한 잔 기울였습니다. 한 명 한 명의 노고를 치하하며 가깝게 챙기셨어요. 메모리 반도체 사업 포기처럼 중요한 시기에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단호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은 ‘독하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권 대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말로 비켜갔다. 보고나 회의시간에 집요하게 “왜?”라고 묻는 그의 ‘딥 퀘스처닝(deep questioning)’은 인텔코리아 내에서도 유명하다.

권 대표는 IT업계 여성 1세대로서 여성 후배들에게 기회를 넓혀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인텔코리아에 대표로 돌아오면서 정한 목표 중 하나다. 최근엔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와 손잡았다. 경력 단절 여성, 이공계 희망 여성을 빅데이터 분석 및 인공지능(AI)을 교육할 수 있는 전문인력으로 키우는 내용의 업무협약을 맺었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통념을 누군가는 깨야 했고, 첫 번째 세대인 제 역할이었을 뿐이에요. 여성의 사회 진출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한 명의 독보적인 스타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꾸준하고 조직적인 노력을 작지만 조금씩 실행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비메모리 반도체 대표 인텔…데이터 기업으로 변신 한창

미국에 본사를 둔 비메모리 반도체업계의 대표기업이다. 중앙처리장치(CPU) x86 시리즈로 PC 시장을 주도했다.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춰 컴퓨팅 및 통신기술, 데이터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업계 처음으로 반도체 패키징 작업에 3D(3차원)를 적용한 기술인 ‘포베로스’, 차세대 CPU 아키텍처 ‘서니코브’를 선보일 계획이다. 2020년까지 자율주행자동차, 인공지능(AI) 가속기 등에 쓰이는 외장 그래픽 프로세서도 도입하기로 했다.

인텔코리아는 1988년 설립됐다. 2015년 권명숙 대표가 취임하면서 본사 부사장 직함을 얻어 인텔 내 한국지사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명숙 인텔코리아 대표 약력

△1964년 서울 출생
△1986년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대우통신 입사
△1988년 인텔코리아 입사
△1999~2005년 인텔코리아 마케팅 담당 상무
△2005~2011년 인텔코리아 영업 담당 전무
△2011~2015년 삼성SDI 소형전지 마케팅 담당 상무
△2015년 3월~ 인텔코리아 대표 인텔 본사 영업마케팅그룹 부사장
권명숙 대표의 단골집 만강 수서점

남도 한정식 전문…고소한 병어요리 일품


서울 강남 수서역 인근에 있는 남도 한정식 전문점이다. 경기 분당시 야탑점이 본점으로 수서점은 2017년 말 문을 열었다. 율현공원을 끼고 있어 서울 같지 않은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1층은 홀, 2·3층은 개별 방으로 구성돼 가족 모임 및 회식 장소로 좋다. 각 방은 청산도, 임자도, 죽도 등 전남의 섬 이름을 땄다.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재료는 전남 신안, 목포, 완도 등에서 고속버스로 배달받는다. 제철 생선과 해물을 내놓기 때문에 철마다 대표 메뉴와 기본 찬이 달라진다.

요즘은 ‘덕자’가 대표 메뉴다. 덕자는 30㎝가 넘는 큰 병어를 가리킨다. 몸통은 회를 뜨고 나머지는 조림으로 내놓는다. 회를 쌈배추에 특제 기름장, 갈치속젓, 부추무침 등을 넣고 싸먹으면 고소하고 깊은 맛을 즐길 수 있다. 장어, 보리굴비, 낙지탕탕이, 민어요리 등도 인기가 많다. 1인 기준으로 덕자 5만원, 민물 장어구이가 3만원 등이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