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한경닷컴>은 자신의 영역에서 특색 있는 상품, 브랜드 등으로 입지를 구축한 기업들의 이야기를 '틈새강자' 기획을 통해 연재합니다. 다양한 스토리를 써낸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에서 혜안을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국내 토종 보리 탄산음료 맥콜이 37살을 맞았다. 기존 탄산음료 강자인 콜라와 사이다의 틈새를 '건강음료' 콘셉트로 파고들어 장수상품으로 자리 잡은 결과다. 국내 최초 보리 탄산음료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맥콜은 일본에서 엔화를 벌어들이는 수출 역군이기도 하다.
맥콜 브랜드 변천사. (사진 = 일화)
맥콜 브랜드 변천사. (사진 = 일화)
◆맥콜, 국내 최초 보리 탄산음료…조용필 효과로 '홈런'

맥콜은 국내산 보리를 원료로 사용한 국내 최초 보리 탄산음료다. 탄산음료지만 비타민C 함유량이 높다는 게 특징이다. 250㎖ 기준으로 비타민C는 75mg이 들어가 있다. 비타민B1 0.8mg, 비타민B2 0.9mg도 각각 포함돼 있다. 비타민C의 함유량은 레몬에이드보다 26배나 높다.

맥콜의 탄생은 박정희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맥콜을 만든 주역은 농어촌개발공사(현재 농수산식품유통공사)다. 1970년대 후반 식량 자급률이 높아지면서 보리가 남아돌자 정부는 농가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보리 소비 진작책을 전개한다. 보리 소비를 위해 농어촌개발공사는 1979년 보리 탄산 개발에 성공했다.

농어촌개발공사는 상품화를 위해 여러 음료회사를 찾았지만, 일화만이 보리 탄산의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보리 탄산음료가 한국 탄산음료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제약회사로 출발한 일화는 당시 일화생수 주식회사와 합병한 후 음료 사업을 전개하던 차였다.

1982년 7월21일 처음 시장에 등장한 맥콜은 초반에는 냉대를 받았다. 사이다와 콜라가 탄산음료 시장을 꽉 잡고 있던 만큼, 보리탄산이 대중에게 생소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목욕탕에서 남성들이 맛보고 '개운하다'는 평가로 '건강드링크'로 입소문을 탔다. 이후 맥콜은 소비자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1984년 건강음료라는 점을 강조하며 변신에 나섰다.

'고향의 맛 맥콜'이라는 카피를 내세우고 용량도 200㎖, 340㎖, 640㎖로 다양화했다. 건강을 앞세운 콘셉트는 통했다. 초도물량이 5만병에 그쳤지만 1985년 8월 당시에는 한 달간 700만병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당시 맥콜이 전체 음료 시장 점유율은 15.7%에 달했다. 국내 탄산업계에 양대 산맥이었던 콜라와 사이다의 구도를 무너뜨린 결과였다.

여기에 맥콜은 가수 조용필을 기용한 광고로 인기에 불을 붙였다. 일화는 1986년 가수 조용필과 그의 팬클럽 6000명을 섭외해 1분짜리 TV 광고를 만들었다. 당시 조용필의 모델료는 한국 광고 사상 최초로 1억원에 달했다. 회사는 맥콜 광고를 위해 88 올림픽 경기장까지 빌려 뜨거운 콘서트 현장을 광고로 담아냈다.

음료 광고보다 조용필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광고에 회사 내부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젊은층에게 맥콜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맥콜 광고 속 조용필은 "젊음의 갈증은 맥콜로 풀자"며 젊은층에게 '우리는 맥콜세대'라고 강조했다. 이는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조용필 광고 효과에 1985년 53억원에 그쳤던 매출은 900억원을 폭증했다. 다음해인 1988년 매출액은 1400억원으로 더욱 뛰었다.

매출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의 탄산음료 시장의 강자들도 움직였다. 보리탄산음료를 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 미국 코카콜라는 '보리보리'를 내놨다. 롯데칠성도 '비비콜', 해태음료(현재 해태htb)도 '보리텐'을 선보이면서 유사제품이 줄줄이 등장했다. 또 이들은 젊은층을 겨냥한 맥콜의 마케팅도 그대로 이용, 해태음료는 보리텐 모델로 가수 이상은을 기용했다.

뒤늦게 보리탄산음료에 뛰어든 회사는 제품 가격까지 낮추면서 유통망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에 맥콜의 인기도 시들해졌다. 보리 탄산음료 시장이 커지지 않고 오히려 맥콜의 매출액을 갉아먹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탄산음료 트렌드 변화도 맥콜에 직격탄을 날렸다. 1989년 주윤발이 "사랑해요 밀키스"를 외치면서 탄산음료 트렌드는 보리 탄산에서 우유 탄산으로 넘어갔다. 이 여파로 전체 음료 시장에서 보리음료 비중은 쪼그라들었다. 1990년 전체 음료시장에서 9.6%였던 보리음료 점유율은 1992년 3.1%로 급감했다.

보리 탄산 시장 자체가 줄어든 가운데 1987년 85%였던 맥콜의 보리음료 시장 점유율은 1992년 47.7%로 반토막이 났다. 경쟁사들은 보리음료 시장에서 하나 둘 발을 빼기 시작했다. 롯데칠성은 1996년 비비콜 판매를 중단했고, 보리텐과 보리보리도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맥콜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1998년 매출은 20억원으로 주저앉았다.

설상가상으로 회사에 위기도 닥쳤다. 일화는 1998년 6월 퇴출기업으로 판정을 받은 뒤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1000명이었던 인력을 450명까지 줄이고, 68개였던 제품은 40개만 남겼다. 이후 일화는 2000년 경상이익 흑자(20억원)을 달성한 뒤 히트상품 맥콜을 재기시키는 데 집중했다.

◆ 2000년대 '웰빙 트렌드'와 함께 부활
1982년 출시된 일화 맥콜이 37살을 맞았다. (사진 = 일화)
1982년 출시된 일화 맥콜이 37살을 맞았다. (사진 = 일화)
2000년대 들어 맥콜은 건강을 중요시하는 웰빙트렌드에 맞춰 건강음료라는 이미지로 부활에 나섰다. 캔 제품 외에도 1.5L 페트병으로 제품을 확대했다. 2004년엔 240㎖ 캔과 500㎖ 페트병 제품도 추가했다.

보리가 동맥 경화, 심장질환을 유발하는 트랜스 지방 흡수를 억제한다는 효능으로 각광을 받던 시기였다. 2008년부터는 전라남도 강진군 유기농 겉보리를 사용했고, 2011년 패키지 디자인도 바꿨다. 파란색이 강조된 물결 모양을 넣어 초정리 광천수로 만든 음료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후 일화는 맥콜의 새로운 소비층을 겨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맥콜의 주요 소비자층이었던 40대는 자양강장제 등을 찾는 경향이 높다는 점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목표 소비층을 초등학생으로 선택, 새로운 유통채널을 노렸다. 용량을 200㎖로 줄이고 가격도 200~300원으로 낮추면서 학교앞 문방구에서도 판매를 전개했다.

초등학생들에겐 맥콜은 '신제품'으로 통하면서 인기를 이어갔다. 콜라와는 달리 상큼하면서 달짝한 맛이 신선하게 다가갔다. 2011년 맥콜 매출은 210억원까지 회복했다.

2013년부터는 젊은 연예인을 기용해 20대 젊은층에게 다가갔다. 2013년 광희를 기용해 톡톡 튀는 일명 '맥콜댄스'를 선보인 데 이어 이듬해에는 경쟁사였던 코카콜라와 대결하는 광고를 선보였다. 배우 주원이 '보리봉'을 들고 코카콜라를 대표하는 백곰과 결투를 벌여 이기는 내용이다. 2015년에는 'MC맥콜'로 변신한 박형식과 NS윤지를 기용해 힙합 버전으로 광고를 전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유일한 보리탄산의 입지를 굳힌 맥콜은 수출 주역이 됐다. 맥콜은 미국 호주 베트남 캄보디아 일본 등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기준으로 일본 수출 비중이 50%로 가장 높다.

일본에서 맥콜은 '맷코오루'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이며, 온라인상에서 맥콜 팬사이트도 운영되고 있다. 일본의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 동화'에도 맥콜 캐릭터가 등장할 정도로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다.

일화 해외영업 담당자는 "일본에서 판매하는 맥콜은 한국과 같은 제품으로, 특별히 광고나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매니아층이 생겼다"며 "일본에 수출하는 일화 제품 중 맥콜은 25%(물량 기준)에 달한다"고 말했다.

고은빛 한경닷컴 기자 silverligh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