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처음 히말라야에 올랐다. 청계천 시장 골목에 마련한 6.6㎡짜리 등산장비 가게가 망하기 직전이었다. 1991년 정부가 산에서 취사, 야영을 금지한 타격이 컸다. 절벽 끝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히말라야를 찾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히말라야 원정대를 후원했지만 직접 히말라야를 등반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엄홍길 대장과 함께 팀을 꾸려 초오유(해발 8201m), 시샤팡마(8027m)에 올랐다. 숨이 턱턱 막히고 메스껍고 이게 고산병이구나 싶었다.

히말라야에서 돌아와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야영 금지조치가 해제되기만 기다릴 순 없었다. 업종을 바꾸기도 싫었다. 선택은 하나였다. 등산용품 일변도에서 의류 비중을 확 늘리기로 결정했다. 투박했던 등산복을 알록달록하게 디자인해 패션 등산복 시장을 개척했다. 아웃도어라는 용어도 생소한 시절이었다. 토종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를 연매출 3900억원대(2018년 기준) 브랜드로 키운 강태선 회장 얘기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히말라야 오르며 인생 배워

강 회장은 일흔이 된 올해에도 히말라야를 찾았다. 이번엔 다른 목적이었다. 히말라야 일대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오기 위해서였다. 산을 오르기도 힘든데, 쓰레기까지 줍는 건 두 배 이상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김미곤 대장, 셰르파(산악인의 등반을 돕는 사람), 대리점주 등과 함께 네팔 카트만두에서 5400m 지점 베이스캠프까지 오르며 총 300㎏의 쓰레기를 회수했다. 앞으로 10년을 목표로 ‘클린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날 계획이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산악인이라고 칭하는 그는 히말라야를 수십 번 다녀오면서 그때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등산용품 업체 동진사가 망할 위기에 처했던 1993년 히말라야에 다녀온 뒤 의류로 사업을 확장했다. 1997년엔 안나푸르나(8091m)와 칸첸중가(8586m)에서 네팔인 셰르파가 숨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고귀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돌아오자마자 외환위기가 닥쳤다. 위기는 기회였다. 실직자들이 산을 찾았고 여성도 등산을 즐기기 시작했다. 예쁜 등산복을 찾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일찌감치 의류에 투자한 블랙야크는 급성장했다. 강 회장은 “높고 낮은 고개를 오르내리며 열정을 쏟다 보면 끝내 정상에 오르는데, 사업도 비슷한 게 많다”며 “인생이나 고산 등반, 기업 경영이 모두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체력 안배하듯 잘될 때 위기 대비해야”

“위기는 호황에 오고 기회는 불황에 온다.” 강 회장이 수십 년간 산을 타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교훈이다.

이번 히말라야를 다녀온 뒤엔 극복과 회복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고 한다. 누구든 3000m 이상 오르면 산소 부족을 느끼는데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는 얘기다.

강 회장은 “어지러우면 쉬고 자신의 페이스에 따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입맛이 없어도 음식을 먹고, 체력을 보충하면서 내려올 때 쓸 에너지를 보충하는 건 생존과 직결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라갈 때 체력의 60%를, 내려올 때 40%를 써야 하는데 보통 오를 때 80%를 써버리니 내려올 때 사고가 나는 것”이라며 “체력 안배가 중요하듯 기업 경영에서도 잘될 때 위기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근시안적 사고보다는 근본적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믿는다. 2013년 국내 아웃도어업계가 정점을 찍은 뒤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그는 단기적인 매출 확대를 꾀하지 않는다. 대신 과거엔 그냥 제품만 잘 생산해 팔면 되는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기업의 경영철학, 브랜드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데 주목했다. 2014년 미국 캐주얼 브랜드 ‘나우’를 인수하면서 그의 이런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나우는 제조공정에서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는 등 공정무역을 중시하는 브랜드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살아남을 수 있는 브랜드, 소비자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좋아하는 회사가 되려면 ‘지속가능성’ ‘친환경 브랜드’ ‘경험 공유’ 등과 같은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친환경·지속가능 경영에 초점

올해 초 나우는 서울 압구정동에 나우하우스를 열었다. 제품을 파는 매장이 아니라 아티스트 전시회를 여는 체험형 공간으로 꾸민 것도 강 회장의 이런 경영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전시, 공연, 플리마켓 등을 여는 문화공간을 조성하자 젊은 층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우는 지금까지의 국내 패션 브랜드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도시를 선정해 깊이 분석하는 ‘나우매거진’을 발행하고, 업사이클링 작품을 나우하우스에 전시하기도 한다.

블랙야크는 다음달엔 스위스 체르마트에 숙박시설 ‘야크하우스’도 연다.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묵으면서 블랙야크 제품을 무료로 빌려 다양한 야외활동을 즐기게 하려는 취지다.

강 회장은 “요즘 우리 회사에 입사하려는 젊은 친구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기업이어서 지원했다’ ‘배울 게 많다’고 하더라”며 “장사하는 기업보다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을 추구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2016년부터 중국 쿠부치 사막에 나무를 심는 ‘생태원 조성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게 대표적 예다. 또 네팔에 학교를 세우고, 국내에선 클린 마운틴 365캠페인을 여는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강 회장은 올해 제2대 한국아웃도어스포츠산업협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위기에 처한 국내 아웃도어, 스포츠 업체들을 해외에 진출시키는 게 목표”라고 했다. 혁신적 신제품을 개발하고 해외 박람회에 출품하는 등 상생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그의 경영철학인 ‘호시우행(虎視牛行: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보되 소처럼 신중하게 행동한다)’을 협회 운영에도 적용하겠다고 했다. 강 회장은 “내 비전은 한국 아웃도어 브랜드를 세계 산악인이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로 키우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블랙야크가 해야 할 일을 꾸준히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강태선 회장 프로필

△1949년 제주도 출생
△1968년 제주 오현고 졸업
△2007년 제주국제대 경영학과
△2009년 동국대 경영학 석사
△2017년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 경영학 박사
△1973년 동진사 설립
△1978년 몽블랑 등정
△1994~2009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1995년 블랙야크 론칭
△2013년 강태선나눔재단 및 장학재단 이사장
△2014년 미국 브랜드 나우 인수
△2019년 제2대 한국아웃도어스포츠산업협회장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미래 산악인 키우자" 북한산 앞자락에 어린이 등산교실 열어

“아이들이 갈 데가 없어요. 실내에만 있으면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죠. 산을 타면서 배포를 키우고 멀리, 높게 보는 눈도 갖게 해야 합니다.”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은 지난 4월 말 서울 우이동에 BAC센터를 열었다. 산악인뿐 아니라 야외활동을 즐기는 젊은 층, 어린이를 끌어모으고 싶다고 했다. 7세 이상 아이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낮은 높이의 실내 암벽장부터 전문가가 이용할 수 있는 성인용 클라이밍 시설도 갖췄다. 강 회장은 “청소년이 자연 속에서 놀아야 도전정신도 키우고 몸도 정신도 건강해진다”며 “요즘 부모들은 위험하다고 집안에서만 키우는데 시야를 좁게 만들면 안 된다”고 말했다.

BAC센터를 우이동에 연 이유와 관련해 강 회장은 “한국 1세대 산악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 북한산 인수봉”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에서 산악회가 시작된 게 1945년 9월이니까 해방과 역사를 같이한다”며 “산악회의 상징과도 같은 인수봉을 젊은이와 청소년이 찾아오는 숨쉬는 자연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BAC센터에서는 소외계층과 지역 아동 등을 위한 무료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우이동과 북한산을 연계한 문화역사 자연탐방 프로그램, 심폐소생 등 생활체육 프로그램 등도 기획하고 있다.

강 회장은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 젊은이들은 말을 잘 하지 않는다”며 “말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배포가 없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자연을 벗 삼아 뛰어노는 외국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짱을 키우고 도전정신을 갖추는 것과 비교된다는 얘기다. 그는 “아이들이 모험심을 기를 수 있는 저렴한 강습 프로그램과 함께 엄마들이 쉴 수 있는 카페도 들여놨다”며 “단순히 제품을 파는 상업적 목적의 공간이 아니라 멀리 보고 미래의 산악인을 키우는 데 투자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