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홍영표 "대우車 용접공으로 위장취업…첫 담판서 김우중 회장 내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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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표 더불어민주당 前 원내대표
협상은 나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
민노총, 국민과 함께하는 노조 돼야
협상은 나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
민노총, 국민과 함께하는 노조 돼야
“여의도에서 좀 멀리 있고 싶어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인터뷰 장소로 인천 삼산동 한 식당을 골랐다.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정치 과잉을 너무 심하게 겪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홍 의원은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식당 주인과 종업원, 손님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눴다. 식당의 대표 메뉴는 돼지갈비. 280g에 9900원이다. 집권여당 원내대표 출신의 입맛치곤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고 맛있는 집이어서 노동자와 서민들이 많이 사는 이 지역에 딱 맞다”고 했다.
이력서에 채워진 협상가의 면모
전북 고창이 고향인 홍 의원은 1983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올해로 37년째다. 스스로 부평 토박이가 다 됐다고 했다. 그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다니던 대학(동국대 철학과)에 자퇴서를 내고 중졸 학력으로 위장취업했다. 운동권 선후배들처럼 ‘현장’으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전기용접 자격증도 땄다. 이후 노동운동가에서, 공직자로, 다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의 이력서 대부분은 협상과 갈등을 중재하는 업무로 채워졌다. 홍 의원은 “유독 협상 전면에 나서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며 “다행히 실패한 협상은 기억에 많지 않다”고 했다.
첫 ‘담판’ 상대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1985년 4월 중공업 분야 대기업 사상 첫 파업을 이끌었다. 노조 비상대책위원장이던 홍 의원은 김 회장과 3박4일 담판을 통해 그해 임금을 18.2% 올렸다. 당시 전두환 정부가 제시한 상한선(9.9%)의 두 배에 가까웠다.
불법 파업으로 경찰에 수배돼 쫓기는 신세가 된 홍 의원을 김 회장이 차 트렁크에 숨겨 공장 밖으로 빼내준 일화는 현장에선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중졸’ 노조원과 김 회장이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했다.
“현장에선 회사와 협상을 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저는 대화파였죠. 파업을 위한 파업보단 협상을 통해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홍 의원은 당시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첫 옥살이를 했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감옥에 더 갔다.
협상가의 면모는 홍 의원이 노무현 정부 시절 공직에 몸담은 이후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그는 2004년부터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2급)으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 선정,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 지역 갈등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 187개 공기업 지방 이전이 노동조합의 반대로 막히자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로 풀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FTA 국내대책본부장을 맡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킨 일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엔 FTA 반대론자였다”며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동료 정치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고집하기보단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실용주의적인 모습이 홍 의원의 장점이라고 평가한다. “가장의 고민과 정치인의 꿈 사이 고민 여전”
불판에서 고기가 익어가듯 대화도 무르익었다. ‘소맥’(소주+맥주)이 몇 차례 돌자 정치인이 아니라 ‘생활인’으로 살던 얘기를 꺼냈다. 홍 의원은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3선의 원내대표 경력만 보면 ‘꽃길’을 걸은 엘리트 정치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친의 후광이나 넉넉한 집안 배경과는 거리가 멀다. 유력한 정치적 후원을 등에 업은 경우도 없었다.
국회의원 이전에는 그 역시 생계형 가장이었다. 1995년 대우자동차 영국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한국을 떠난 뒤 대우가 부도나면서 2001년 돌아왔을 때도 가장 큰 걱정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정치는 꿈도 꾸지 않았다.
당시 벤처 바람을 타고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온라인 기반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정보기술(IT)업체였다. 지금의 위키피디아와 비슷하다. 하지만 투자금을 제때 모으지 못했다. 한국의 채식 문화를 바탕으로 한 식당을 열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 투자금을 받지 못해 좌절했다. 오랜만에 만난 운동권 친구들이 “천하의 홍영표가 돈 벌어 뭐하냐”고 핀잔하는 데 자극받아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함께 만든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의 시작이었다.
2008년 첫 선거에서 낙선한 뒤엔 다신 정치를 안 하겠다고 다짐도 했다. 홍 의원은 “집도 한 채 없는 ‘놈’이 내 꿈만 고집하는 게 맞느냐”고 거듭 자신에게 되물었다. 총선 패배 후 생계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어깨 위에 놓인 가장이란 짐이 자신의 꿈을 짓눌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8년 총선에서 자신을 누른 구본철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것이다. 2009년 보궐선거(인천 부평을)에 입후보해 압도적인 표 차로 상대를 누르고 국회에 입성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홍 의원은 “보궐선거에 당선된 뒤 한 달 만에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그때 미처 찾아뵙지 못한 게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선거제 개편을 통한 지역주의 타파로 노무현 정신을 살리는 길이 빚을 갚을 유일한 길”이라고도 했다.
“혁신성장 노력하고 있다”
고추장 양념이 인상적인 물냉면이 나왔다. 돼지갈비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는 열무김치도 잘 어우러졌다. 요즘 홍 의원의 국회 사무실과 집엔 탈모방지 샴푸와 검은콩 등 건강식품이 잔뜩 쌓여 있다. 선거제 개편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논란이 있었던 지난달 30일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어려운 협상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져가면서 고생했다”고 말하면서 ‘탈모의 아이콘’이 됐다. 홍 의원은 “패스트트랙은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협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원내대표로서의 스트레스가 심했단 얘기다. 1990년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준비위원회 출신인 그는 민주노총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수십 명의 노조원이 달려들거나, 지역사무실을 점거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홍 의원은 “민주노총 준비위에 있을 당시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국민과 함께하는 노조’를 지향했다”며 “하지만 지금의 민주노총은 국민은커녕 조합원과도 괴리가 상당하다”고 비판했다.
자동차와 같이 구조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산업에선 노조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의 르노삼성 파업사태는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고 꼬집었다. 홍 의원은 “미국의 GM 노조는 공장 폐쇄 위협에도 파업이 아니라 물량 따오기 경쟁을 하고 있다”며 “하지만 물량이 보장된 상황에서 월급을 올려달라는 르노삼성의 파업은 국민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강성 노동운동가였던 홍 의원의 이 같은 변화는 6년간 영국 주재원 생활이 계기가 됐다. 그는 “기업 경영에 대해 배우고, 세계를 보는 넓은 눈을 갖게 되면서 균형을 찾았다”고 했다.
홍 의원은 소득주도성장 등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선 산업구조의 변화도 고려해 달라고 당부했다. 자영업과 대척점에 있는 온라인 쇼핑은 전체 소비의 10%를 넘겨 80조원 이상에 달했고, 해외 직접구매도 20억달러를 넘어섰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홍 의원은 “지난해 최저임금이 16.4% 오른 건 분명히 과한 측면이 있다”며 “그러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2년 동안 지나치게 많이 오른 최저임금에 대한 속도 조절도 예고했다. 홍 의원은 “이제 최저임금은 조정할 수 있다고 본다”며 “내년엔 동결로 가거나 경제성장률 수준에서 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의지도 인정해달라고 덧붙였다. 홍 의원은 원내대표 시절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인터넷전문은행 특별법을 관철시켰다. 일정 기간 규제를 완전 면제해주는 규제 샌드박스 등 ‘규제혁신 5법’도 그의 성과다. 그는 “데이터 규제를 완전히 푸는 ‘빅데이터 3법’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역시 야당과 합의를 끝냈다”며 “국회가 열리면 바로 입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영표는 누구인가…
노동운동가 출신 3선 국회의원으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거친 정치인이다. 동국대(77학번) 재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이후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대우자동차 불법 파업으로 지명수배돼 옥살이를 했으며 출소 후 대기업노동조합연대회의 사무처장과 한국노동운동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노동전문가답게 18대 국회 일자리만들기특별위원회 위원, 19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 20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등을 맡았다. 노동자 출신이면서 강경 노조를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 소신파다.
2013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을 주도했고, 작년 2월에는 국회 환노위원장으로서 근로시간 단축 합의를 이끌었다.
■홍영표 前 원내대표 약력
△1957년 전북 고창 출생
△익산 이리고, 동국대 졸업
△동국대 행정학 석사
△동국대 행정학 박사 수료
△1983년 대우자동차 차체부 용접공 입사
△1990년 대우그룹 노동조합협의회 사무처장
△2002년 개혁국민정당 중앙당 조직위원장
△2004년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
△2007년 재정경제부 FTA국내대책본부 본부장
△18·19·20대 국회의원
△2016년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2018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홍영표 前 원내대표의 단골집 고기가마니
'가성비' 뛰어난 돼지갈비…열무김치도 일품
인천 삼산동에 있는 고기가마니는 돼지왕갈비(280g 9900원)와 돼지맛갈비(250g 8900원)를 대표 메뉴로 한 고깃집이다. 양념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열무김치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돼지갈비로 유명한 집이지만 질 좋은 한우구이도 단골들이 많이 찾는 메뉴다. 특등심(150g 4만6000원) 채끝등심(150g 3만1000원) 살치살(150g 5만2000원) 등 다양한 부위의 1++등급 한우를 맛볼 수 있다. 식사 후에는 특제 양념에 열무김치를 얹은 냉면(7000원)으로 마무리한다. 아파트 단지가 빼곡한 주거 밀집지에 있어 동네 주민 사이에서 맛집으로 통한다. 식당 인근에 청천천이 흘러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면 야외에서 식사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김우섭/김소현 기자 duter@hankyung.com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인터뷰 장소로 인천 삼산동 한 식당을 골랐다. “원내대표로 있으면서 정치 과잉을 너무 심하게 겪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홍 의원은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이곳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식당 주인과 종업원, 손님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눴다. 식당의 대표 메뉴는 돼지갈비. 280g에 9900원이다. 집권여당 원내대표 출신의 입맛치곤 소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고 맛있는 집이어서 노동자와 서민들이 많이 사는 이 지역에 딱 맞다”고 했다.
이력서에 채워진 협상가의 면모
전북 고창이 고향인 홍 의원은 1983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올해로 37년째다. 스스로 부평 토박이가 다 됐다고 했다. 그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용접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다니던 대학(동국대 철학과)에 자퇴서를 내고 중졸 학력으로 위장취업했다. 운동권 선후배들처럼 ‘현장’으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전기용접 자격증도 땄다. 이후 노동운동가에서, 공직자로, 다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의 이력서 대부분은 협상과 갈등을 중재하는 업무로 채워졌다. 홍 의원은 “유독 협상 전면에 나서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며 “다행히 실패한 협상은 기억에 많지 않다”고 했다.
첫 ‘담판’ 상대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1985년 4월 중공업 분야 대기업 사상 첫 파업을 이끌었다. 노조 비상대책위원장이던 홍 의원은 김 회장과 3박4일 담판을 통해 그해 임금을 18.2% 올렸다. 당시 전두환 정부가 제시한 상한선(9.9%)의 두 배에 가까웠다.
불법 파업으로 경찰에 수배돼 쫓기는 신세가 된 홍 의원을 김 회장이 차 트렁크에 숨겨 공장 밖으로 빼내준 일화는 현장에선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중졸’ 노조원과 김 회장이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했다.
“현장에선 회사와 협상을 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저는 대화파였죠. 파업을 위한 파업보단 협상을 통해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홍 의원은 당시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첫 옥살이를 했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감옥에 더 갔다.
협상가의 면모는 홍 의원이 노무현 정부 시절 공직에 몸담은 이후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그는 2004년부터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2급)으로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 선정, 평택 미군기지 이전 등 지역 갈등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 187개 공기업 지방 이전이 노동조합의 반대로 막히자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로 풀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FTA 국내대책본부장을 맡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킨 일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엔 FTA 반대론자였다”며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동료 정치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고집하기보단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실용주의적인 모습이 홍 의원의 장점이라고 평가한다. “가장의 고민과 정치인의 꿈 사이 고민 여전”
불판에서 고기가 익어가듯 대화도 무르익었다. ‘소맥’(소주+맥주)이 몇 차례 돌자 정치인이 아니라 ‘생활인’으로 살던 얘기를 꺼냈다. 홍 의원은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3선의 원내대표 경력만 보면 ‘꽃길’을 걸은 엘리트 정치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친의 후광이나 넉넉한 집안 배경과는 거리가 멀다. 유력한 정치적 후원을 등에 업은 경우도 없었다.
국회의원 이전에는 그 역시 생계형 가장이었다. 1995년 대우자동차 영국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한국을 떠난 뒤 대우가 부도나면서 2001년 돌아왔을 때도 가장 큰 걱정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정치는 꿈도 꾸지 않았다.
당시 벤처 바람을 타고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온라인 기반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정보기술(IT)업체였다. 지금의 위키피디아와 비슷하다. 하지만 투자금을 제때 모으지 못했다. 한국의 채식 문화를 바탕으로 한 식당을 열 계획을 세웠지만 역시 투자금을 받지 못해 좌절했다. 오랜만에 만난 운동권 친구들이 “천하의 홍영표가 돈 벌어 뭐하냐”고 핀잔하는 데 자극받아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함께 만든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의 시작이었다.
2008년 첫 선거에서 낙선한 뒤엔 다신 정치를 안 하겠다고 다짐도 했다. 홍 의원은 “집도 한 채 없는 ‘놈’이 내 꿈만 고집하는 게 맞느냐”고 거듭 자신에게 되물었다. 총선 패배 후 생계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어깨 위에 놓인 가장이란 짐이 자신의 꿈을 짓눌렀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8년 총선에서 자신을 누른 구본철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것이다. 2009년 보궐선거(인천 부평을)에 입후보해 압도적인 표 차로 상대를 누르고 국회에 입성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홍 의원은 “보궐선거에 당선된 뒤 한 달 만에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그때 미처 찾아뵙지 못한 게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선거제 개편을 통한 지역주의 타파로 노무현 정신을 살리는 길이 빚을 갚을 유일한 길”이라고도 했다.
“혁신성장 노력하고 있다”
고추장 양념이 인상적인 물냉면이 나왔다. 돼지갈비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는 열무김치도 잘 어우러졌다. 요즘 홍 의원의 국회 사무실과 집엔 탈모방지 샴푸와 검은콩 등 건강식품이 잔뜩 쌓여 있다. 선거제 개편안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논란이 있었던 지난달 30일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어려운 협상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져가면서 고생했다”고 말하면서 ‘탈모의 아이콘’이 됐다. 홍 의원은 “패스트트랙은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협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원내대표로서의 스트레스가 심했단 얘기다. 1990년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준비위원회 출신인 그는 민주노총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수십 명의 노조원이 달려들거나, 지역사무실을 점거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럼에도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홍 의원은 “민주노총 준비위에 있을 당시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국민과 함께하는 노조’를 지향했다”며 “하지만 지금의 민주노총은 국민은커녕 조합원과도 괴리가 상당하다”고 비판했다.
자동차와 같이 구조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산업에선 노조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의 르노삼성 파업사태는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고 꼬집었다. 홍 의원은 “미국의 GM 노조는 공장 폐쇄 위협에도 파업이 아니라 물량 따오기 경쟁을 하고 있다”며 “하지만 물량이 보장된 상황에서 월급을 올려달라는 르노삼성의 파업은 국민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강성 노동운동가였던 홍 의원의 이 같은 변화는 6년간 영국 주재원 생활이 계기가 됐다. 그는 “기업 경영에 대해 배우고, 세계를 보는 넓은 눈을 갖게 되면서 균형을 찾았다”고 했다.
홍 의원은 소득주도성장 등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선 산업구조의 변화도 고려해 달라고 당부했다. 자영업과 대척점에 있는 온라인 쇼핑은 전체 소비의 10%를 넘겨 80조원 이상에 달했고, 해외 직접구매도 20억달러를 넘어섰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홍 의원은 “지난해 최저임금이 16.4% 오른 건 분명히 과한 측면이 있다”며 “그러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2년 동안 지나치게 많이 오른 최저임금에 대한 속도 조절도 예고했다. 홍 의원은 “이제 최저임금은 조정할 수 있다고 본다”며 “내년엔 동결로 가거나 경제성장률 수준에서 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의지도 인정해달라고 덧붙였다. 홍 의원은 원내대표 시절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인터넷전문은행 특별법을 관철시켰다. 일정 기간 규제를 완전 면제해주는 규제 샌드박스 등 ‘규제혁신 5법’도 그의 성과다. 그는 “데이터 규제를 완전히 푸는 ‘빅데이터 3법’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역시 야당과 합의를 끝냈다”며 “국회가 열리면 바로 입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영표는 누구인가…
노동운동가 출신 3선 국회의원으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거친 정치인이다. 동국대(77학번) 재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이후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대우자동차 불법 파업으로 지명수배돼 옥살이를 했으며 출소 후 대기업노동조합연대회의 사무처장과 한국노동운동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노동전문가답게 18대 국회 일자리만들기특별위원회 위원, 19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 20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등을 맡았다. 노동자 출신이면서 강경 노조를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 소신파다.
2013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을 주도했고, 작년 2월에는 국회 환노위원장으로서 근로시간 단축 합의를 이끌었다.
■홍영표 前 원내대표 약력
△1957년 전북 고창 출생
△익산 이리고, 동국대 졸업
△동국대 행정학 석사
△동국대 행정학 박사 수료
△1983년 대우자동차 차체부 용접공 입사
△1990년 대우그룹 노동조합협의회 사무처장
△2002년 개혁국민정당 중앙당 조직위원장
△2004년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
△2007년 재정경제부 FTA국내대책본부 본부장
△18·19·20대 국회의원
△2016년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2018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홍영표 前 원내대표의 단골집 고기가마니
'가성비' 뛰어난 돼지갈비…열무김치도 일품
인천 삼산동에 있는 고기가마니는 돼지왕갈비(280g 9900원)와 돼지맛갈비(250g 8900원)를 대표 메뉴로 한 고깃집이다. 양념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감칠맛이 일품이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열무김치와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돼지갈비로 유명한 집이지만 질 좋은 한우구이도 단골들이 많이 찾는 메뉴다. 특등심(150g 4만6000원) 채끝등심(150g 3만1000원) 살치살(150g 5만2000원) 등 다양한 부위의 1++등급 한우를 맛볼 수 있다. 식사 후에는 특제 양념에 열무김치를 얹은 냉면(7000원)으로 마무리한다. 아파트 단지가 빼곡한 주거 밀집지에 있어 동네 주민 사이에서 맛집으로 통한다. 식당 인근에 청천천이 흘러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면 야외에서 식사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김우섭/김소현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