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7년이다. 체육관에서 치러지던 대통령 선거가 그해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바뀌었다. 이후 1998년, 2008년, 2017년 세 차례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쯤 됐으면 민주주의가 정착될 만도 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야 정치권은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적대감을 더 강력하고 거칠게 뿜어내고 있다.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상정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더니 상호 고발 등 법정 공방으로까지 이어가고 있다.

한국 정치권이 왜 이렇게 됐을까. 첫 번째 이유로 ‘정권 교체의 역설’을 꼽고 싶다. 많은 국민은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별 것 아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는다. 정치인들은 반대다. 정권을 잃자마자 실업자가 되고 온갖 특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정치 보복도 심해진다. 정권 교체를 체험할수록 정권에 더 집착하게 된다.

환경부의 한 산하기관 상임감사 면접에서 청와대 추천 인사가 떨어지자 당시 청와대 한 비서관이 “자유한국당 출신보다 못하다는 거냐”고 호되게 질책했다고 한다. 자기네 편이 아닌 사람은 능력을 따질 것도 없다는 얘기다. 정권이 바뀌면 주요 공직은 물론 산하기관 인사까지 물갈이 대상이다. 정권을 내놓고 싶겠는가.

두 번째 문제는 ‘선거공영제의 부작용’이다. 대통령은 물론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교육감 선거에서 유효 득표의 15% 이상 얻으면 선거 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보전받는 제도가 선거공영제다. 출마자들은 정치자금을 모으지 않아도 되지만, 지지자들의 외연을 적극 넓힐 필요성도 사라진다. 당 주변만 어슬렁거린다. 15% 이상 득표가 확실한 양대 정당으로 쏠리면서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세 번째는 ‘편파성을 키우는 소통’이다. 많은 정치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지지자를 끌어모은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 글을 쓰거나 유튜브 같은 곳에 동영상을 올린다.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의 ‘TV홍카콜라’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알릴레오’ 등이 대표적이다. 시청자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말이 거칠어진다. 지지층도 과격해지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자기편만 믿는 확증 편향도 심해진다.

네 번째는 ‘삼권 분립의 역류’다. 균형과 견제를 위해 도입한 삼권 분립 제도가 오히려 극단화를 유발하고 있다. 야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청와대의 발목을 잡고, 청와대는 야당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권을 최대한으로 휘두르고, 판사들은 정파적 가치관을 거리낌 없이 판결문에 반영한다. 권력을 분점한 기관들이 균형점을 찾기 위해 절제하기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마구 휘두르려는 욕구에 빠져들고 있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보루처럼 여겨졌던 법원 등 각종 제도적 완충장치마저 허물어지고 있다. 국민은 이제 정치인뿐만 아니라 판사가 어떤 성향인지 알아야 하는 상황이다. 헌법재판관이나 대법관 선임마저 정파적으로 결정된다. 최근 일어난 대법원장을 겨냥한 화염병 투척 사건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다섯 번째 문제는 ‘다수결의 유혹’이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다수결을 택하고 있다. 공직 선출이나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다수의 뜻에 따르자는 취지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한발 더 나아가 많은 문제를 다수결로 해결하고 싶어 한다.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사회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를 외치는 이유다. 민주주의를 만능해결도구로 여길수록 개인의 인권과 자유, 재산권이 위협받는다.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 튼튼한 정치제도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중우정치(衆愚政治)에 휘둘리다 귀족정으로 전락했다. 20세기 들어 많은 국가가 민주주의를 도입했으나 쿠데타 또는 선거로 집권한 통치자에 의해 상당수가 무너졌다. 상대를 경쟁자로 인정하는 관용과 이해, 권한을 행사할 때 신중한 절제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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