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상법개정안, 글로벌 스탠더드 아니다
법무부는 최근 4개의 상법 개정 쟁점안 중 ‘감사위원 분리 선임’과 ‘집중투표제 의무화’ 개정은 다음으로 미루고 ‘다중대표소송제 도입’과 ‘전자투표 의무화’ 개정에 우선 매진하기로 했다.

입법 전략을 수정해 가면서까지 상법을 개정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법무부 장관이 한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가 발전하려면 기업이 글로벌 스탠더드 관점에서 한 단계 성장해야 하며, 상법 개정은 그 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배경을 언급했다고 한다. 상법의 글로벌 스탠더드화(化)와 한국 경제의 발전이 그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중대표소송제 도입과 전자투표 의무화가 글로벌 스탠더드인지는 심도 있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상법 개정안에 따르면 다중대표소송제란 모회사 지분 1%(상장사는 0.01%) 정도만 소유하면 모든 자회사 등의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다.

상장사의 경우 지분 0.01%만 소유하면 99.99%의 여타 주주가 반대해도 자회사 및 손자회사의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 자회사 및 손자회사의 주주 중 50%가 모회사와 무관한 주주일지라도 가능하다. 상당수의 주주는 순수한 의도를 갖고 회사를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상당수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특히 행동주의 펀드들이 그 당사자가 되는 경우 당해 회사는 물론이고 한국 경제에 미치는 부작용이 심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선진 각국은 우리 상법 개정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법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문법주의 국가 중 일본을 제외하고 다중대표소송제를 명문화한 나라는 없다. 일본도 자회사 지분을 100% 소유한 경우에만 모회사 주주에게 대표소송제기권을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불문법주의를 택하고 있는 영미법계 국가들은 판례를 통해 자회사 지분을 100% 소유한 경우에만 허용한다. 설령 허용하더라도 법원의 제소 허가 등과 같은 엄격한 남소(濫訴) 방지 장치를 추가로 운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다중대표소송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전자투표제 역시 법률로 이를 의무화한 나라는 아직 없다. 다만, 자치규범인 정관을 통해 그 실시 여부를 정하도록 한 나라가 많다. 우리나라도 이런 추세를 반영해 2010년 5월부터 이사회 결의가 있으면 시행하도록 상법에 근거 규정을 두었다. 올해 개최된 주총에서 전자투표 행사율이 발행주식수 대비 5.4%에 불과했다는 한국예탁결제원의 보고서가 나온 바 있다. 전년도보다 2.9배 증가한 수치이기는 하나, 여전히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자투표를 의무화해야 하며, 그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임이 분명하다.

절차가 정당하지 않더라도 결과적 정당성, 즉 ‘한국 경제의 발전’이라는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괜찮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경험적으로 보건대, 그런 주장은 더 설득력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해 11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주회사 수는 173개이며, 이들 지주사는 평균 10.7개의 자·손자·증손회사를 두고 있다.

이는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들이 1개 지주회사의 지분 1%(상장사 0.01%)만 소유하면 10개 이상의 회사를 동시에 지배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 자본에 유린당하는 국내 자본시장 체제가 마련되면 한국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도 어불성설이 될 수 있다. 법무부 장관이 밝힌 개정 취지에 맞는 새로운 상법 개정안의 마련이 시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