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70·사진)이 국민연금 등 주요 주주의 반대로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1999년 4월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표이사를 맡은 지 약 20년 만이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재계 14위(자산 기준)인 한진그룹 총수를 핵심 계열사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한항공은 27일 서울 공항동 본사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임기 3년) 재선임 안건을 찬성 64.1%, 반대 35.9%로 부결시켰다. 이 회사 정관은 이사 선임과 해임을 특별결의사항으로 분류해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66.66%)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항공 2대 주주(지분율 11.56%)인 국민연금이 조 회장의 이사 연임안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게 결정적이었다. 캐나다공적연기금(CPPIB) 등 지분 24.77%를 보유한 외국인 주주들도 대부분 국민연금에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회장은 대표이사직에서는 물러나지만 대한항공 회장직(미등기 임원)은 유지할 방침이다. 대한항공 최대주주(29.96%)이자 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 대표이사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 어수선한 주총장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안이 27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부결됐다. 대한항공 주주들이 서로 먼저 발언하겠다며 말다툼을 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 어수선한 주총장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안이 27일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부결됐다. 대한항공 주주들이 서로 먼저 발언하겠다며 말다툼을 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조종간 빼앗긴 '20년 기장'…대한항공 '조원태 체제'로 비상운항

“조양호 회장 사내이사 선임 건은 의결 정족수인 3분의 2를 충족하지 못해 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27일 오전 9시56분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 5층. 주주총회 의장을 맡은 우기홍 부사장이 굳은 얼굴로 의사봉을 두드렸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45년간 항공 외길을 걸어온 조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기까지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대 주주(11.56%)인 국민연금과 외국인 주주(24.77%) 상당수가 조 회장의 이사 연임에 반대해 현장 투표도 없이 위임장 사전 집계만으로 부결이 결정됐다. 국민연금의 반대로 대기업 대표가 물러나는 첫 번째 사례가 됐다.

그룹지배력 타격 불가피

국내 1위, 세계 15위(여객 기준) 항공사인 대한항공은 한진그룹의 핵심이다. 지난해 그룹 전체 매출(16조5000억원) 가운데 76%(12조6512억원)가 대한항공에서 나왔다.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회장은 대한항공이 출범한 1969년부터 1999년까지 30년간 대표이사 자리를 놓지 않았다. 부친의 뒤를 이어 조양호 회장도 1999년부터 20년째 대한항공 대표이사를 맡아왔다.

조 회장이 대한항공 이사 연임에 실패해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면서 오너가(家)의 그룹지배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대한항공은 조 회장과 장남인 조원태 사장(44), 우기홍 부사장 등 3인 각자 대표이사 체제에서 조 사장과 우 부사장 2인 대표 체제로 바뀌게 된다. 전문경영인인 우 부사장보다 조 사장이 경영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조 사장은 2017년 사장 승진과 함께 대표이사를 맡았다. 최고경영자(CEO) 경험이 길지 않아 대한항공의 경영 차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 회장이 미등기 임원인 대한항공 회장이자 대한항공 최대주주(29.96%)인 한진칼의 대표이사 자격으로 경영에 간접적으로 참여는 하겠지만, 예전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조 회장이 법적인 책임을 지는 의사 결정 구조에서 빠졌다는 점에서 오히려 책임경영이 후퇴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회장이 다시 사내이사를 맡으려면 임시 주총이나 내년 정기 주총에서 이사 선임 안건이 통과돼야 한다. 하지만 국민연금과 외국인 주주 중 상당수가 조 회장의 이사직 복귀를 반대해 당장 경영 일선 복귀를 추진할 가능성은 낮다고 재계에선 보고 있다.

대한항공 이사회는 조 회장과 조 사장, 우 부사장, 이수근 부사장 등 4명으로 이뤄져 있다. 조 회장이 이사진에서 빠지더라도 이사회 운영엔 문제가 없다. 대한항공 정관은 ‘이사는 3인 이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진칼 주총은 조 회장 측 유리

조 회장과 국민연금, 행동주의 펀드 케이씨지아이(KCGI)는 29일 열리는 한진칼 주총에서 다시 한번 표대결을 벌인다. 조 회장 측이 지분 면에서 유리하다는 관측이 많다. 한진칼 3대 주주(7.10%)인 국민연금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이사는 결원으로 본다’는 정관변경 안을 주주제안으로 올렸다. 27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조 회장을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국민연금이 제안한 정관변경 안건은 주총 특별결의 사항이다. ‘출석주주 3분의 1(33.33%)’ 이상이 반대하면 부결된다. 조 회장 등 특수관계인의 한진칼 지분이 28.93%에 달하는 만큼 정관변경은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한진칼은 조 회장의 측근인 석태수 대한항공 부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안건을 상정했다. 이 안건은 보통결의 사항이어서 출석주주 과반수 의결권만 얻으면 된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석 부회장의 연임안에 찬성표를 행사하기로 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 등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도 석 부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에 찬성을 권고하면서 통과가 무난할 전망이다.

한진칼 2대 주주(10.71%)인 KCGI만 반대표를 던질 전망이다. KCGI가 한진칼에 낸 주주제안(사외이사 선임 등)에 대해서는 서울고등법원이 지난 21일 “KCGI가 주주제안을 할 자격이 없다”는 판결을 내리며 주총 안건 상정 자체가 무산됐다.

김보형/김익환/박상용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