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시작하기 전부터 밀리는 '미세먼지 외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꽃피는 봄날의 화려한 계절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수상한 세월 민심을 은유하던 이 표현이 언제부터인지 ‘미세먼지 점령군’이 장악한 우울한 봄날을 빗댄 말로 변해버렸다. 5년 전 이맘때 열렸던 한·중·일 3국 협력회의가 새삼 떠오른다.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투명했던 한국의 하늘이 중국발 황사와 미세먼지로 침범당한 현실을 통박하면서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중국이 주변국 환경 생태계를 위협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적극적인 환경대책을 주문한 것은 한국 측 대표였다. 3국 회의를 개최한 일본은 제조업 중심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났던 환경오염을 극복한 사례를 설명하면서, 그 경험을 공유하려는 의지를 피력했다. 당시 한국엔 용어조차 익숙지 않았던 PM2.5(초미세먼지)의 심각성을 들추면서 중국을 원인 제공자로 슬쩍 지목했다.

그런데 중국 측은 이웃국가에 대기오염을 초래한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짜고짜 중국이 건설하고 있는 환경산업단지에 투자하라고 나왔다. 이웃의 불행을 자신의 상업적 기회로 둔갑시키는 마술, 이것이 중국인가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시화된 대기오염은 한국인의 삶의 질을 위협하는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가 됐다. ‘사흘 춥고 나흘 온난한 겨울’의 삼한사온(三寒四溫)은 ‘사흘 춥고 나흘 미세먼지’라는 삼한사미(三寒四微)로 둔갑술을 부린 지 오래다.

미세먼지가 논란이 되자 국내적인 요인이 지적받기 시작했다. 애꿎게도 고등어 굽는 연기가 원흉으로 지목되더니 자동차 행렬의 타이어 마모로 화살이 옮겨가고, 급기야는 지난 정부의 화력발전소까지 문제가 됐다. 제 아무리 국내적 요인이 작금의 미세먼지 악화에 원인을 제공한다 해도 중국발 미세먼지 공습이라는 외부 요인이 해소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문제는 중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세먼지로 한국민의 민심이 들끓는데도 중국 정부는 “너나 잘하라”는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중국을 두고 국회에서 “한국의 미세먼지도 바람에 따라서는 중국으로 간다”고 발언한 외교부 장관은 어느 나라 외교부 장관인지를 의심케 한다. 권위주의 개발만능시대에 유독 환경문제엔 침묵하는 언론과 정치권을 일깨웠던 이 땅의 환경단체가 지금 놀랄 만큼 조용한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수업 중 미세먼지 해결을 위해 “중국을 어떻게 협상 테이블에 앉힐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했다. 강의실에 가득한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도 자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선진국인 줄 알았던 한국의 후진적인 환경정책을 공박했다. 그들이 접근할 수 있는 영어권 사이트에는 중국 책임론에 관한 자료가 빈약하다. 국제여론전에서 한국이 밀릴 수밖에 없다. 일찍이 국경 간 오염물질 이동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른 서구의 경험은 결국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적 근거를 쌓아야 하고, 그 문제를 제기할 외교 협상의 장이 마련돼야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흥분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전략도 없이 조율되지 않은 내부 책임론 운운하는 것은 협상력을 심각하게 훼손할 따름이다.

심각한 환경오염은 여성, 노약자, 유아에게 더 치명적인 인권문제가 아닐까. 촛불혁명 정부를 자임하는 현 정부가 집권 초 금쪽같은 시간을 과거와의 전쟁으로 허비하는 동안 이 치명적인 인권침해는 너무나 소홀히 취급돼왔다. ‘소확행’ ‘워라밸’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경제현장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주 52시간 근로제를 인권 차원에서 밀어붙였다면, 미세먼지 대책도 처음부터 고강도로 추진했어야 마땅하다. 물론 거기엔 중국과의 협상전략이 포함됐어야 한다.

2008년 봄 한국을 들끓게 한 미국산 소고기 파동을 수습하려고 워싱턴DC로 날아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 측에 광화문과 시청광장을 뒤덮은 촛불시위 사진을 펼쳐 던졌다. 중국과 환경협상을 하는 한국은 중국발 미세먼지가 바람을 타고 한국으로 유입되는 위성사진부터 펼쳐 놓고 협상해야 할 것이다. 물론 중국을 협상 테이블에 앉혀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은 중국을 어떻게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