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길 잃은 '개념정치'가 부르는 비극
미국 증권시장에 거품이 한창이던 1990년대 후반 ‘개념주(concept stock)’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인터넷 열풍을 타고 출현한 ‘닷컴(.com)’기업 주식을 일컫는 용어로 쓰였다. 아메리카온라인, 월드컴, 버티컬넷 등 닷컴기업들이 상장하자마자 증시를 달궜다. 확실한 수익모델은커녕 기업가치도 검증받지 않은 주식에 투자자가 몰려들었다. 앨런 그린스펀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이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을 경고했지만 귀 기울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뉴욕 특파원으로 이 광풍을 지켜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래지 않아 닷컴 주식의 날개 없는 추락이 시작됐고, 그 충격은 증시 전체를 강타했다. 2000년 3월 5048.62까지 치솟았던 나스닥지수가 2002년 10월 1114.11까지 고꾸라졌다. 신기루가 무너져내리고 나서야 전문가들의 자성(自省)이 쏟아졌다. 개념주라는 조어(造語)를 만들고 퍼뜨린 데 대한 반성이 잇따랐다. 증권시장에서 유망주식을 구분하는 용어는 성장주(growth stock)와 가치주(value stock) 둘뿐이었다. 성장성과 내재가치,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얼치기 주식을 개념주라는 용어로 호도해 투자자의 판단을 흐리게 한 것은 월가 전문가들의 업보로 남았다.

‘개념의 덫’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곳은 증시뿐만이 아니다. 정치의 세계는 더 심각하다. 이상(理想)을 자극하는 달콤한 구호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현실과 부딪히는 순간 허상(虛像)을 드러내는 일이 수시로 벌어진다. ‘형편 되는 만큼만 일하고도 필요한 만큼 갖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증시에서의 닷컴 광풍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 세계에서도 미몽(迷夢)이 속속 깨져나가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해 영국과 독일의 좌파 정당들이 국가주도 경제와 복지의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 역동성을 살리는 ‘제3의 길’로 선회한 게 시발점이었다. 독일은 좌파 사회민주당 정부 시절 단행한 고용유연성 개혁(하르츠합의)으로 시장 활력과 유럽 경제의 맹주(盟主) 자리를 되찾았다. 헌법 전문에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적 국가’임을 못 박을 정도로 좌파 전통이 뿌리 깊은 프랑스에서도 개인과 기업들의 역동성을 살리려는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개혁정책이 등장했다. 사회주의 물결로 뒤덮였던 남미에서도 잃어버린 경제 활력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 확산되고 있다. 좌파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론주의 국가 아르헨티나가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의 친시장 개혁으로 돌아섰고, 브라질에서도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탈(脫)국가주의 개혁이 시작됐다.

이들 국가에 공통된 게 있다. 개념이 그럴듯해 보였던 분배적 공동체주의를 실험했고, 국가 활력 추락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나서야 궤도 수정에 나섰다는 점이다. ‘더불어 잘사는 경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를 국정과제로 내걸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새겨야 할 대목이다. 개념으로서의 구호는 아름답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음은 유럽과 남미 국가들의 숱한 시행착오가 보여줬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년 동안의 경제상황으로도 입증됐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개별 사업장과 근로자의 사정을 인정하지 않는 강압적인 근로시간 단축, 장기 재정상황을 감안하지 않은 복지 확대가 빚은 문제는 심각하다. 갈수록 커지는 고용대란과 기업들의 투자 위축 및 시장 역동성 상실은 곳곳에서 위기 경보음을 울리고 있다. 세계 양대 신용평가 회사인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의 성장률 추락, 기업 신용위기 경고가 동시에 터져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청와대와 정부에서는 경제상황과 경기지표들에 대한 낙관적 판단이 이어지고 있다. 정책 기조의 ‘흔들림 없는 추진’을 다짐하는 것도 여전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정부’라는 시장참가자들의 한숨이 나온 지 꽤 됐다. “산초야, 두려움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라.” 길가에서 마주친 양떼를 ‘사악한 적의 군대’라며 공격한 돈키호테가 자신을 말린 산초에게 한 얘기다. 공명심에 사로잡혀 분별력을 잃은 돈키호테는 양치기들의 반격으로 갈빗대와 이빨이 왕창 부러지는 대가를 치렀다. 분별력 잃은 국정의 대가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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