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 대해 “서두를 것 없다”는 말만 다섯 번 되풀이했다. 또 “긴급한 시간표는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오는 27~28일로 예정된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북핵의 완전한 폐기 약속을 받아내라는 미국 내 여론의 기대치를 낮추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하노이는 중간기착지일 뿐 이번 회담에서 ‘핵리스트 신고’는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속도조절 또 강조한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하노이 회담’과 관련해 2분 남짓 발언하면서 속도조절 입장을 거듭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특별히 서두를 게 없다. 제재는 유지되고 있으며 (북한과의) 관계는 매우 강하다”고 운을 뗐다. 이어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과 6·25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 등을 거론한 뒤 “로켓과 미사일, 핵실험이 계속 없었다”며 “우리는 서두를 게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론들은 ‘속도, 속도, 속도’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정말이지 서두를 게 없다”고 말했다.

이날 발언에 대해 로이터통신은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이 핵무기를 즉시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멀어졌다”며 “대신 북한이 요구해온, 좀 더 점진적이고 상호 간에 주고받기를 하는 접근법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이뤄진 미·북 1차 정상회담 이후 줄곧 북한에 ‘시간표와 리스트’를 요구했다. 작년 8월 초엔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6~8개월 내 핵탄두의 60~70% 폐기’를 골자로 한 비핵화 시간표를 제안했으나 북한이 이를 수락하지 않고 있다는 미 언론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대북 협상 책임자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이 얼마나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공개하게 하는 것을 협상의 주요 목표로 삼고, 북한이 핵탄두 보유량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이를 거부했고, 급기야 지난해 11월 초 폼페이오 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의 ‘뉴욕 회담’이 무산됐다.
"서두를 것 없다" 다섯 번 되풀이한 트럼프…美 여론 기대치 낮추기
‘스몰 딜’에 대한 우려 여전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궁극적으론 (북한의) 비핵화를 볼 것”이라면서도 “긴급한 시간표는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 건 백악관과 행정부의 북핵 접근법이 달라졌음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러시아, 중국, 한국 사이에 있는 그들(북한)의 입지가 믿기 힘들 정도로 좋다”며 비핵화 시 북한에 펼쳐질 밝은 미래를 강조하기도 했다.

미국의 달라진 대북 전략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외교 치적을 강조하기 위해 ‘스몰딜’에 만족할 것이란 지적도 만만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핵·미사일) 실험이 없는 한 서두를 게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이 같은 의구심을 일으키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않는 지금 상황에 큰 불만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로드맵조차 합의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속도 조절’ 발언은 북한의 ‘시간 끌기’ 전략에 말려들지 않고 북한을 압박하겠다는 뜻이라는 분석도 있다. ‘시간표가 달린 핵리스트 제출’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 북한도 제재 완화와 같은 ‘선물’을 아예 기대하지 말라는 경고라는 뜻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올초 신년사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의 조건 없는 재개’를 언급하며, 제재 완화를 거듭 주장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제재는 유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 국무부도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가 달성될 때까지 (제재는) 유지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박동휘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