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가선 안 될 길', 베네수엘라에 묻는다
2015년 3월 페루 수도 리마. 자유주의 경제석학들의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총회’에 뜻밖의 인물이 기조연설자로 등장했다. 페루의 노벨문학상(2010)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였다. 팔순 노(老)작가는 거침이 없었다. “남미 발전에 최대 걸림돌은 혁명보다 포퓰리즘이다. 정확히는 현재를 위해 국가 미래를 희생시키는 선동적인 사회·경제 정책들이다.”

남미의 전형적 좌파 지식인이 환상을 품었던 옛 소련과 쿠바를 목격한 뒤 180도 변신한 것이다. 역시 노벨문학상(1990) 수상자인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도 비슷한 지적 여정을 걸었다. 더 극적인 인물은 종속이론가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다. 그는 재무장관 시절 브라질의 초(超)인플레를 잡고, 재선 대통령까지 지냈다. 카르도주는 “폐쇄된 민족주의나 이념 과잉으로는 국익을 추구할 수 없다”며 과거 오류를 인정했다.

지금도 586세대의 책장 한구석에는 카르도주, A G 프랑크 등의 ‘종속(從屬)이론’ 서적들이 누렇게 바랜 채 꽂혀 있을 것이다. 80년대 운동권치고 그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민족, 반미, 반독점, 반봉건’ 등의 이론적 토대였다. 공교롭게도 그런 종속이론의 파탄을 입증한 게 한국 등 ‘네 마리 용’이었다. 중심부(선진국)의 착취·수탈로 주변부(제3세계)는 ‘저(低)발전’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종속이론으로는 중국 인도 베트남의 발전도 설명할 수 없다.

풍부한 자원과 농업 기반을 가진 남미는 어째서 인구만 많은 동아시아와 정반대 길을 갔을까. 결정적 차이는 ‘수입대체 산업화’로 문을 닫아건 데 있다는 분석이다. 경쟁이 사라지자 기업들은 혁신 대신 정치권에 줄을 대 지대(정치적 독점이익) 추구에 골몰했다. 정부는 수입 억제를 위해 실력보다 턱없이 높은 통화가치를 유지해 수시로 외환위기로 치달았다.

반면 동아시아는 수출로 일어섰다. 개도국의 발전 경로는 종속이론이 아니라 200여 년 전 데이비드 리카도(비교우위론)가 이미 일깨워준 셈이다. 종속이론과 오십보백보인 박현채의 ‘민족경제론’대로였다면 남미 근처에 가 있었을지 모른다.

21세기까지 종속이론의 미몽(迷夢)에서 못 깨어난 나라가 베네수엘라다. 외신으로 전해진 민생 파탄은 눈과 귀를 의심케 한다. 영국 BBC는 베네수엘라 위기를 9개 그래픽으로 정리했다. 19일마다 두 배로 뛰는 인플레, 5년째 마이너스 성장, 국민 64%의 몸무게 평균 11.4㎏ 감소, 4년 새 300만 명 해외 탈출…. 스티브 행키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암달러 시세로 매일 추계하는 지난 1년간 물가상승률은 11만2189%(1월29일 현재)다.

세계 최대 석유매장국의 몰락 배경에는 차베스와 마두로 집권 20년간의 포퓰리즘, 민중주의, 반(反)기업 등이 깔려 있다. 선출된 독재자들은 ‘국가가 다 해준다’는 퍼주기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란 환상으로 최면을 걸고 권력을 구가했다. 고유가 때는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유가 하락과 함께 20년 적폐가 고스란히 수면 위로 노출된 것이다. 그러고도 버티는 것은 아직도 모든 문제를 미국 탓, 외자 탓으로 돌리면 먹히기 때문이다.

한때 국내에서도 차베스 열풍이 불었다. ‘베네수엘라에 길을 묻자’는 특집보도가 쏟아졌다. 좌파진영 일각에선 차베스의 ‘반미 코드’를 새로운 진로인 양 치켜세웠고, 그의 사망 때는 분향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말이 없다.

요즘 나라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베네수엘라를 자주 언급한다. 복지포퓰리즘 경쟁, 반기업 규제 홍수, 법 위에 올라탄 ‘떼법’과 ‘국민정서법’, 내로남불과 남탓 등이 닮은꼴이란 얘기다. 획일적인 한국 사회는 포퓰리즘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일 수 있다. 퍼주기 포퓰리즘은 사실 막장드라마처럼 욕하면서도 끌린다.

한 경제계 인사의 독백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넘어져도 벌떡 일어났는데, 이제 또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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