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강세 지속, 1~2월 달러당 104엔까지 치솟을 것"
美 경기둔화 우려에 안전자산인 엔화에 투자 몰려
2차전지·MLCC 등 일본 기업과 경합 업종엔 호재
오춘호 선임기자·공학박사
고바야시 요시미쓰 일본 미쓰비시케미컬 회장은 지난 7일 경제단체 새해 인사회에서 “엔고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며 “1~2월에는 달러당 104엔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후지와라 고우지 일본 미즈호은행 총재는 “올해 경기가 불안정할 것이라는 전망은 있었지만 (엔고 등이) 너무나 빨리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농기계 제작업체 구보타의 기마타 마사토시 사장은 “생산을 수출형에서 내수형으로 바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을 게을리하면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구보타는 엔화 가치가 1엔 오르면 영업이익이 연 20억엔 줄어든다. 주력 농기계 및 건설기계 매출의 70%가 해외에서 나온다. 엔고의 고통 속에서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던 일본이다. 그 고통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일본 기업인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달러당 110~120엔대를 유지하던 엔화는 지난 연말부터 엔고 조짐을 보여왔다. 미·중 간 통화전쟁이 격해지고 미국의 경기 둔화 전망이 나오면서다. 새해 들면서 엔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했다. 애플의 실적 발표가 부채질했다. 4일 미국 뉴욕 외환시장 거래에선 달러당 104엔대까지 올라갔다. 지난해 10월 기준(114.08엔) 10엔가량 오른 셈이다. 8일에는 108엔대에서 오르내렸지만 언제 다시 뛸지 모른다. “올해 100엔 깨질 것” 비관론 팽배
올해는 아베 신조 총리가 2012년 집권하면서 내세웠던 아베노믹스가 시행된 지 8년째 되는 해다. 2013년 이후 엔화 환율은 달러당 100엔 이하로 내려간 적이 좀처럼 드물었다. 2015년 8월에는 달러당 124엔까지 엔화 가치가 폭락했다. 하지만 올해 100엔이 깨질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2018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0.9%로 낮춰 발표했다. 올해 전망은 더욱 암울하다. 지난해 일본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14년과 비교해 불과 0.1%포인트 떨어진 236%를 기록했다. 무디스 등 신용평가기관에서 평가하는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은 한국보다 한두 단계 아래에 있다. 그런데도 일본 엔화에 전 세계 돈이 몰리고 있다. ‘엔화의 미스터리’다.
일본 엔화는 단지 일본의 국내 통화가 아니다. 세계 경기 불안정 시 해외 투자자들이 찾는 안전자산으로 변한 지 오래다. 안전자산으로 불리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통화가치에 변동성이 없는 것이 큰 강점이다.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통화를 구입해 금리차 이익을 얻는 캐리 거래가 많은 것도 설명 요인이 될 수 있다. 시장이 불안해져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고금리 통화에서 손을 떼고 엔화를 구입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미·중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차이나머니가 대거 유입되고 있다는 루머도 있다.
환헤지 수요도 엔화 강세 요인
물론 안전자산 이유만은 아니다. 일본의 해외 투자 확대가 가져오는 환헤지 수요와도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기업들은 과거 수년간 해외 투자를 폭발적으로 늘려왔다. 고령화 저출산 등 일본 국내의 불안 요소를 회피하기 위한 해외 투자였다. 지난해 해외 기업 인수는 11월까지 180조엔으로 전년 대비 2배를 훨씬 넘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대신 일본 내에선 상장기업이 거의 늘지 않고 상장하더라도 규모가 작다. 그만큼 일본 기업에는 절박함이 있다. 하지만 해외로 나간 기업들은 리스크가 닥칠 때 일본 국내로 엔화를 송금한다. 이 송금액이 엔고를 불러일으킨다.
日, 엔고 지속될까 전전긍긍
과거의 엔고 현상은 일본 경제력의 상징이었다. 수출이 급증하면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말까지 나왔다. 미국에서 엔화 환율을 조정하면서 플라자합의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엔고 국면은 다르다. 유럽의 신용 불안이나 신흥국의 조정 국면이 내비치면서 갈 곳을 잃은 자금이 찾는 통화로 변질했다. 일본 정부가 주체적으로 엔화 조정을 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통화당국이나 금융기관들도 엔고에 갈피를 못 잡는 분위기다. 지난 4일 일본 금융당국과 일본은행, 금융기관 관계자들이 회동했지만 시장 반응은 냉담했다. “일본은행에 추가 완화 수단이 부족하다”(일본 대형 은행 관계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기업과 제조업계가 이번 분기에 상정한 환율은 달러당 109엔 정도다. 엔고 기조대로라면 4분기(2019년 1~3월) 기업 실적은 악화할 것이고 그 여파로 주가는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이미 일본 무역수지에 위기감이 드러나고 있는 마당이다. 지난해 11월 일본의 무역수지는 7373억엔 적자였다. 2개월 연속 적자다. 12월에도 사정이 나아지리란 법이 없다. 일본 경제가 내수 중심으로 간다고 하지만 수출의 영향력은 아직 크다. 관광 중심의 서비스산업도 큰 타격을 받는다. 엔고로 관광업이 무너지면 중앙정부의 책임이 커진다. 오는 4월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엔고의 지속성 여부다. 엔고가 수개월 지속되면 일본 정부로서도 고역이다. 일본은 다시 양적완화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엔 호재, 기회 살려야
한국으로 봐선 엔고 현상이 나쁠 게 없다. 한국이 급성장한 시기도 엔고가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필수적인 부품이나 소재를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 분야는 그다지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하지만 일본과 경쟁하는 업종은 이득을 볼 게 분명하다. 전기자동차용 2차전지를 비롯해 최근 수출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등 일본과 경합하는 전자부품업 등에는 희소식이다.
올해 세계는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unknown unknown)’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구조다.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그 행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를 짜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불안정할수록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건 경영의 상식이다. 규제를 없애고 정부의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 이런 행운을 잡지 못하고 지나치면 더 이상 한국 경제에 미래는 없다.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