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 두렵습니다.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국내 10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내년 경영환경을 한마디로 ‘전시(戰時)’라고 정의했다. 대내외 상황이 올해보다 더 악화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그는 “급박한 경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그룹 내에 비상경영상황실인 ‘워룸’ 설치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악재는 거의 지뢰밭 수준이다. 미·중 무역전쟁, 신흥국 경제위기, 내수침체, 원화 강세 등이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수년간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정보기술(IT) 업황마저 침체 징후가 뚜렷하다.

재계 관계자는 “미래가 불안한데 투자나 채용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겠느냐”며 “규제 완화를 포함한 범정부 차원의 ‘컨틴전시 플랜(비상계획)’이 나와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안에선 규제, 밖은 무역전쟁 '지뢰밭'…'워룸'까지 설치하는 기업들
내년 경영 시계(視界) 제로

한국경제신문이 26일 30대 그룹(자산 기준, 공기업과 금융회사 제외)을 대상으로 ‘내년 경기전망 및 사업계획’ 설문조사를 한 결과 올해보다 내년 경영환경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한 곳은 25곳으로 전체의 83.3%에 달했다. 이 가운데 2개 그룹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비슷할 것이라는 전망은 5곳(16.7%)에 그쳤고, 나아질 것이라는 대답은 전무했다.

악화된 경영환경은 실적에 직결될 것으로 우려됐다. 내년 실적(영업이익 기준)이 올해보다 나빠질 것이라고 답한 곳은 11곳(36.7%)으로 집계됐다. 10개 그룹(33.3%)은 올해와 비슷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어려운 경영 환경을 반영하듯 상당수 기업은 내년 경영 키워드를 신성장 동력 발굴을 의미하는 ‘미래성장(12곳·40.0%)’으로 꼽았다. 자산매각 등 구조조정을 의미하는 ‘내실 다지기(26.7%)’와 ‘긴축 경영(20.0%)’ 등 불황에 대비한 경영 목표도 많았다.

내년 공격 투자·채용 포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기업들은 내년에 투자와 채용을 늘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설문에 응한 30대 그룹 중 20곳(66.7%)은 내년 투자가 올해와 비슷한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올해보다 투자를 늘리겠다’는 응답은 6곳(20.0%)에 불과했다. 기업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상승(27.3%)과 기업 경영을 옥죄는 공정거래법 상법 등 각종 규제(22.7%) 탓에 투자를 늘리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했다.

내년 채용도 ‘올해와 비슷할 것(21곳·70.0%)’이란 대답이 가장 많았다. 정부의 투자·고용 확대 요청에 대해 ‘부담으로 느낀다’고 응답한 그룹도 25곳(83.4%)에 달했다. 실제 투자와 채용은 공개적으로 발표된 계획보다 줄어들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대통령의 산업현장 방문에 부담을 느낀 기업들이 장밋빛 투자·채용 계획을 발표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이 위축되면서 산업계 전반에 냉기가 퍼지고 있다는 우려도 크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는 최근 협력사들에 ‘반도체 업황 침체에 대비해 내년 반도체 시설 투자를 줄이겠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와 조선업체들도 판매 부진 여파로 중소 협력사에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주력 제조업에 이어 IT산업까지 침체에 빠질 경우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보형/박종관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