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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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대국인 세 나라의 지도자들이 정치 생명을 건 싸움을 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테리사 메이 총리가 그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방안에 반대하는 의회에 맞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프랑스에선 대중적 분노가 폭풍처럼 일어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덮쳤다. 마크롱 대통령은 처음에는 시위대의 요구를 무시했지만 결국 유류세 인상 계획을 철회하고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기로 하는 등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기독교민주연합(CDU) 대표에서 물러나면서 한 편의 정치 드라마가 펼쳐졌다. CDU 대표 선거에서 메르켈 총리가 지지한 후보는 반(反)메르켈 진영에 맞서 가까스로 승리했다.

유럽의 기둥이자 세계적으로도 강대국인 이들 나라의 혼란은 단지 특정 정치인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들 나라의 정치 체제는 전반적으로 한계에 이르렀다.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있기 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부상했고, 좌파 성향이 강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당내 온건파를 누르고 승리했다. 영국 정치 체제는 이런 사건들의 영향으로 바뀌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기존 정당 시스템을 무너뜨리면서 권력을 잡았다. 독일에서는 반체제 성향의 좌파 정당과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꾸준히 힘을 키워가고 있다. 반면 중도 성향 정당들은 점점 세력을 잃고 있다.

사회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종종 포퓰리스트가 반란을 일으킨다. 브라질에선 심각한 경기 침체와 대규모 부패 사건이 있은 뒤 우파 포퓰리스트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패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기존 정치권에 유권자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이탈리아에 포퓰리즘 정부가 등장한 것도 경기 침체의 결과다. 이탈리아 국내총생산(GDP)은 아직도 10년 전인 2008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범죄가 끊이지 않고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 멕시코에선 좌파 포퓰리스트가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독일, 영국, 프랑스는 상황이 다르다. 메르켈 총리 재임 기간 독일 경제는 세계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잘나갔다. 영국은 브렉시트 불확실성 속에서도 경제가 비교적 좋았다. 실업률도 낮게 유지됐다. 프랑스는 경제성장이 느려졌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나타난 이 나라의 평균 임금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연평균 1% 이상 올랐다. 독일, 영국, 프랑스 유권자들이 느끼는 불만은 역사적인 기준에 비춰봤을 때 그리 크지 않다.

유럽 정부를 뒤흔드는 대중의 불만과 미국 정치에 퍼지고 있는 분노는 사회경제적 상황이 비교적 좋은 시기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은 사그라들었다. 많은 나라가 호황의 절정에 이르렀다.

전통적인 정치학 이론에 따르면 이런 상황은 재임 중인 지도자에게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유권자들은 경제 상황이 나쁠 때 불만을 갖고, 경제 상황이 좋을 땐 관대해진다. 지금은 다르다. 미국과 유럽 대부분 국가의 경제가 장기간 꾸준히 성장했는데도 유권자들은 저항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프랑스는 세금이 너무 무겁다. 지역 간 불균형도 있다. 프랑스 농촌 지역과 북부 잉글랜드, 옛 동독 지역 등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많이 성장하지 못했다. 유권자들의 불만은 종종 문화 또는 계급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민, 경제적 불평등, 엘리트 계층의 오만 등이 대중의 분노를 산다.

미국은 경제지표는 좋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막말과 논란을 일으키는 정책, 각종 의혹에 대한 수사가 유권자들의 반감을 낳았다. 그 결과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정말로 큰 문제는 경제마저 침체됐을 때 서구 정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 하는 점이다. 경제가 계속 좋을 수는 없다. 다음번 불황은 선진국 정치 체제를 시험에 들게 할 것이다. 독일의 중도 정치 세력은 실업률이 4%대일 때도 타격을 입었다. 만일 실업률이 6% 또는 8%로 상승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프랑스 근로자의 임금이 오르고 있는데도 파리 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임금이 떨어지기 시작할 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경제가 좋은 상황인데도 영국은 분열돼 있다. 브렉시트를 하든 하지 않든 경기 침체가 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비슷한 얘기로 미국 경제 호황이 끝나고 불황이 시작되면 미국 정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무가 푸를 때보다는 말랐을 때가 더 걱정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빨리 얻을지도 모른다. 무역 갈등, 주식시장의 변동성,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 등은 지금의 경기 호황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신호다. 경기 호황은 역사적으로 가장 긴 기간 이어져 왔다. 좋은 시절이 가고 또 한 번의 경기 침체가 왔을 때 정치 리더십은 폭풍우를 헤쳐나갈 용기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원제=Voters Rebel in Europe’s Big Three

정리=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column of the week] 경제 괜찮은데…'유럽 빅3' 유권자의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