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 신고리 5호기는 2022년, 6호기는 2023년 준공을 앞두고 있다.   /연합뉴스
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 신고리 5호기는 2022년, 6호기는 2023년 준공을 앞두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정부 에너지 정책을 전면 폐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비현실적인 정책을 고치자고 하는 것인데 정부는 왜 귀를 닫고 있는지 답답합니다.”

원자력업계 한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안전과 환경을 중시하는 추세를 감안하면 원자력발전 비중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보라고 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세계 원전 비중이 작년 5.7%에서 2030년 3.6~5.2%로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문제는 정부의 탈(脫)원전 방식이 너무 급진적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겉으론 “60여 년에 걸쳐 천천히 탈원전하자는 것”이라고 하지만 신규 원전 중단 등 정책을 보면 속도가 빠르다. 원전업계와 학계가 가장 우려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 관계자는 “이대로라면 힘들게 키운 세계적인 전문 인력이 해외로 다 빠져나가고 국가 전력 수급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건설 중이던 원전까지 중단

짓던 원전마저 멈춰 매몰비용만 1兆…"脫원전 재고할 때 됐다"
원자력업계와 에너지 전문가들이 탈원전 정책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신규 원전 6기의 중단이다. 이 중 신한울 3, 4호기는 터빈 등 주요 기기 제작이 시작된 상태다. 공사 중단으로 4200억~5900억원의 매몰 비용이 발생하는 게 불가피하다. 여기에 5900억원을 들여 고친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로 발생한 매몰 비용까지 합치면 1조원에 육박한다. 이 비용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원전 건설 중단으로 산업 생태계가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는 점이다. 한 원전기자재 업체 관계자는 “원전 건설 중단으로 내년 가을께면 일감이 사실상 끊긴다”고 전했다. 원전산업의 핵심인 설계·기자재 분야에서 제조 인력 약 1만1000명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당장 내년부터 핵심 인력의 엑소더스(대탈출)가 벌어지고 원전산업 생태계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짓던 원전마저 멈춰 매몰비용만 1兆…"脫원전 재고할 때 됐다"
“탈원전 못박는 건 위험”

세계 원전 운영 국가 31개국 가운데 탈원전, 즉 원전을 ‘0’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나라는 네 곳뿐이다. 한국과 독일, 스위스, 벨기에다. 프랑스처럼 원전 비중을 줄여나가는 나라도 탈원전을 말하지는 않는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다른 나라는 에너지 수급 여건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원전 제로를 못박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며 “한국도 2030년 정도까지 원전 비중 감축 계획을 제시하되 그 이후 계획은 변경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탈원전 국가’라는 이미지는 정부가 공을 들이고 있는 원전 수출에도 부정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에너지업체 관계자는 “사업을 발주하는 입장에서 탈원전 국가에 원전을 맡기는 게 당연히 불안하지 않겠느냐”며 “최근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대한 수출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급격한 탈석탄, 전력수급 차질

한국은 원전과 석탄을 많이 쓴다. 작년 원전의 발전량 비중은 30.3%, 석탄은 45.4%에 이른다. 정부는 이를 2030년까지 각각 24%, 36%까지 줄일 계획이다. 원전은 안전 차원에서, 석탄은 미세먼지 감축 등 환경 보호 차원에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취지는 좋지만 비현실적인 대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노동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과 멕시코만 전력 소비가 늘어나고 있다”며 “전력 소비가 일정한 나라들도 원전과 석탄 중 하나를 줄여나가는데 한국 같은 나라가 탈원전과 탈석탄을 동시에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김삼화 바른미래당 의원은 “5개 발전공기업 계획에 따라 석탄화력발전소 폐기와 성능 개선을 추진하면 2026년부터 전력예비율이 적정 수준인 22%보다 밑으로 떨어진다”며 “전력 수급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태양광·풍력 장비는 외국산”

정부는 원전과 석탄의 빈자리를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채우겠다는 복안이지만 이런 계획마저 부실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신재생에너지산업 경쟁력이 외국보다 떨어지는 상황에서 공급부터 늘리고 보자는 식의 정책 때문에 외국산 장비가 범람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풍력발전기 시장의 외국산 점유율은 2014년 0%였으나 올 9월 70%로 급증했다. 핵심 장비를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고용 파급 효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