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키패드 없는 아이폰…창조는 지우는 데서 출발한다
컴퓨터로 글을 쓰다 막힐 때, 필요 없는 파일을 과감히 지우고 싶을 때 우리는 키보드 오른쪽 맨 위에 있는 ‘딜리트(Delete)’ 키를 누른다. 그렇게 뭔가를 왕창 지워버릴 때 왠지 모를 후련함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또 새로운 뭔가를 다시 채울 기회, 창조할 기회를 준다. 딜리트라는 작은 키(key)가 지닌 힘이다.

딜리트 키를 누르는 것처럼 창조는 지움, 비움, 삭제에서 시작한다. 스티브 잡스가 창조한 혁신적 스마트폰인 아이폰은 휴대폰의 키패드를 삭제하는 데서 시작했다. 키패드를 삭제하고 나니 터치패드라는 새로운 입력체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콘텐츠 기획자인 김유열 EBS 프로듀서가 쓴 《딜리트》는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는 기존 명제를 ‘삭제는 창조의 어머니’라는 명제로 변형시켜 새로운 방정식을 도출해낸다. 저자는 창조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유에서 무로 만드는 과정, 즉 딜리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강조한다. 이 기술만 익숙해지면 누구든지 쉽게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노장의 무위사상과 니체의 니힐리즘에서 출발해 딜리트(삭제)라는 키워드가 우리 삶과 비즈니스를 어떻게 진보시켰는지 역사, 철학, 예술, 건축, 패션, 문학, 과학, 디자인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보여준다. 피카소는 원근법을 버렸고 샤넬은 장식을 걷어내고 치마를 잘랐다. 제임스 다이슨은 선풍기 날개를 없앴고, 태양의 서커스는 동물쇼를 없앴다. 말보로는 여성용 담배라는 초기 콘셉트를 버렸다.

저자 역시 자신이 제작한 EBS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에서 ENG카메라(휴대용 TV카메라)와 1급지, 여행정보라는 관행을 없애며 김유열표 여행프로그램이란 뚜렷한 정체성을 구축한다. 이렇듯 딜리트는 저자가 25년간 해왔던 업무의 성패를 분석하다 떠올린 끝에 찾아낸 아이디어다. 저자 자신이 딜리트 기술로 분명한 개선과 개혁의 효과를 맛봤기 때문에 책으로까지 냈다. 고만고만한 아이디어, 복잡하게 꽉 막힌 상황 속에서 남들과 다른 뭔가를 해야 한다면 책 속 동서고금의 딜리터(deleter)들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참고해볼 만하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