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국왕·왕세자와 전화 뒤 사우디 압박 강화
터키-사우디 역내 패권 경쟁…사우디 왕세자, 3월 "터키는 악의 삼각형"
사우디 물고 안 놓는 터키…카슈끄지 살해범 신병인도 공세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관한 가장 많은 정보를 확보해 주도권을 쥔 터키가 사우디를 좀처럼 놔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사우디는 터키의 압박에 한 발짝씩 물러서며 '타협'하자는 신호를 보내지만 터키는 이를 수용하는 듯하면서도 사우디를 더 난처한 곳으로 몰아넣는 모양새다.

국제적인 이목이 쏠린 사건의 당사자인 사우디로선 터키의 전략에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을 판이다.

이달 2일 이스탄불 주재 총영사관을 방문한 카슈끄지가 행방불명되자 사우디 정부는 총영사관을 나간 뒤 실종됐다고 했지만 터키 정부는 언론을 교묘히 이용해 사건 발생 이튿날부터 그가 총영사관 안에서 기획 암살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우디의 발뺌에도 터키 측은 그가 살해되는 현장의 영상, 음성 파일을 확보했다고 흘리면서 사우디의 애를 태웠다.

터키 정부가 어느 수준까지 사건의 실체에 대한 물적 증거를 보유했는지 알 길이 없는 사우디는 터키에서 나오는 기획 암살설을 단계적으로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20일 사우디는 실종설을 번복하고 카슈끄지가 총영사관 안에서 사우디에서 온 정보요원들의 우발적인 폭력으로 살해됐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했다가 25일 비로소 이 '사우디 팀'이 사전 계획해 그를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터키는 지난 한 달간 이른바 사우디의 '뒤통수'를 치고 빠지는 모습도 보였다.

14일 사건 발생 뒤 처음으로 살만 사우디 국왕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통화했다.

이슬람권의 종교적 서열은 살만 국왕이 우위였으나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먼저 전화했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은 "살만 국왕이 형제인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통화해 사건을 조사하는 합동실무조사단 구성을 제안했다.

양 정상은 양국의 형제애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이 통화 직후 사우디는 치외법권이 적용돼 자국 영토로 인정되는 사우디 총영사관을 터키 경찰에 내줬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통화 이틀 뒤 "수사팀이 독극물을 찾고 있고, 일부 독성물질에 페인트로 덧칠해진 흔적을 발견했다"며 당시까지 '실종설'을 고수했던 사우디를 당황케 했다.
사우디 물고 안 놓는 터키…카슈끄지 살해범 신병인도 공세
이어 24일엔 사건의 '몸통'으로 의심받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에르도안 대통령이 처음으로 통화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 통화 직후 미래투자이니셔티브 행사에 나와 "살만 폐하, 왕세자인 나, 에르도안 대통령이 있는 한 양국 간 불화는 없다"며 "터키와 긴밀히 협조해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겠다"고 말했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여유 있는 표정을 근거로 사우디와 터키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이뤄졌다는 추측도 나왔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26일 집권당 행사에서 카슈끄지의 시신 소재와 살해를 지시한 윗선을 밝히라면서 "이 사건에 관해 공개한 것 외에 다른 증거가 더 있지만 서두르지는 않겠다"고 사우디를 더욱 압박했다.

사우디가 카슈끄지 사건에 대해 '실종→우발적 과실치사→계획적 살해'로 입장을 번복하면서 체면을 구기는 동안 터키는 사우디에 전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사우디가 계획적 살해까지 인정한 만큼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터키는 이제 사우디가 구금한 용의자 18명의 신병에 대한 사법 관할권을 놓고 사우디에 공세를 펴고 있다.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이 26일 "범인들은 사우디인이고, 사우디 영토 안(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며 "사우디에서 이들을 조사해 형사소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27일 "범죄는 이스탄불에서 저질러졌다"며 "사우디가 사법 절차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터키 당국이 그것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터키 당국이 사우디에 구금된 범죄인의 신병 인도를 위한 절차를 착수하면서 갈등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카슈끄지가 치외법권인 총영사관 안에서 살해됐으나, 보도된 대로 그의 시신이 총영사관 밖으로 반출돼 터키 현지의 조력자에게 넘겨져 '처리'됐다면 터키의 사법권의 관할이라는 주장도 틀리지 않는다.

터키와 사우디의 이런 불화는 19세기 오스만 제국과 알사우드 가문의 충돌, 이슬람형제단을 둔 해묵은 갈등, 지역 내 패권 경쟁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이 같은 역사적이고 거시적인 배경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양국은 최근까지 상당히 감정이 좋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사우디가 단교한 카타르를 터키가 적극적으로 도와 사우디의 걸프 아랍국가에 대한 통제력에 제동을 걸었다.

7개월 전인 올해 3월엔 "무함마드 왕세자가 터키를 두고 이란, 강경 이슬람주의 조직과 함께 '악의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시만 해도 거칠 것 없었던 사우디의 차기 국왕 무함마드 왕세자가 터키에 약점을 잡혀 톡톡히 앙갚음을 당하는 셈이다.
사우디 물고 안 놓는 터키…카슈끄지 살해범 신병인도 공세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