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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자 칼럼] 용인 라씨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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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 논설위원
    [천자 칼럼] 용인 라씨의 탄생
    “더 이상 가난하게 살기 싫었다. 툭하면 싸우고, 체포되고, 쫓기는 삶이 싫었다. 어머니가 고생하며 우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깨끗한 돈을 벌어 가족을 돌보고 싶었다. 농구 선수가 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올해 1월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얻은 미국 출신 남자농구 선수 리카르도 라틀리프(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그는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 햄프턴의 셸 로드(Shell road)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동네여서 사람들은 ‘헬(Hell) 로드(지옥길)’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 2남1녀를 힘들게 키웠다.

    친구들은 패싸움과 도둑질로 날을 보냈다. 그도 이들과 어울리다 F학점까지 맞았다. 육상 운동을 시작해 미친 듯이 연습했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농구를 시작했다. 육상 기술을 응용하니 실력이 쑥쑥 늘었다. 그렇게 해서 장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하자마자 한국으로 와 울산 현대모비스에 입단한 뒤 3연패 달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서울 삼성 썬더스로 옮겨 삼성 부활의 주인공이 됐고, 3년 만인 올해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그가 최근 한국 이름을 ‘라건아’, 본관을 용인으로 정하면서 ‘용인 라씨’ 시조가 됐다. ‘라(羅)’는 라틀리프의 첫 글자, ‘건아(健兒)’는 씩씩한 사나이라는 뜻이다. 본(本)을 용인으로 정한 것은 귀화 신청 당시 소속팀인 서울 삼성의 클럽하우스가 용인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먼저 귀화한 선수도 많다. 타지키스탄 출신의 축구 골키퍼 발레리 사리체프는 ‘신(神)의 손’이라는 별명을 딴 이름 신의손(申宜孫)으로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됐다. 스포츠 분야뿐만 아니다. 덕수 장씨 시조인 위구르계 장수 장순룡(張舜龍), 화산 이씨 시조인 베트남 왕자 이용상(李龍祥·리롱뜨엉), 원산 박씨 시조인 네덜란드인 박연(朴淵·벨테브레), 영도 하씨 시조인 방송인 하일(河一·로버트 할리) 등 수없이 많다.

    한 해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외국인의 창성창본(創姓創本)이 7000여 건에 이른다. 중국동포들이 많이 쓰는 길림 사씨를 비롯해 태국 태씨, 몽골 김씨, 대마도 윤씨, 산동 우씨 등 출신지를 본으로 삼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성은 김, 이, 박 등 한국에 흔한 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자녀가 혼혈이라는 게 알려지면 ‘왕따’를 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운 성씨가 늘어나는 만큼 배타적인 사회 인식도 바뀔 때가 됐다. 한국에서 용인 라씨 시대를 연 ‘라건아’는 고향에 들를 때마다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의 삶에 안주하지 말고 꿈을 위해 노력해라. 나는 열심히 농구한 덕분에 바다 건너 한국에 가서 스타가 됐다. 너희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세계는 넓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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