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체제변화는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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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통일 25년이 지나서야
동독 소득이 서독의 82% 수준 돼
그동안 3000조원 동독에 흘러가
통일이든 평화유지든 공짜는 없다
경제력을 좁히는 게 통일 준비다"
노대래 < 법무법인 세종 고문, 前 공정거래위원장 >
동독 소득이 서독의 82% 수준 돼
그동안 3000조원 동독에 흘러가
통일이든 평화유지든 공짜는 없다
경제력을 좁히는 게 통일 준비다"
노대래 < 법무법인 세종 고문, 前 공정거래위원장 >
지난달 27일, 남북한 정상의 판문점 악수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우리에게도 저런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6자회담, 제네바 미·북회담 등 잠시 서광이 비치는 듯하더니 궂은 날의 연속이었다. 이번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와 약속의 철저한 이행을 솔선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계속 날아드는 메시지가 뭔가 잘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다른 나라 사례를 보더라도 체제 전환만큼은 이론이나 계획처럼 오는 것이 아니다. 너무 들뜰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만 할 일은 더욱 아니라고 본다.
1996년 독일 경제정책연구소에 파견 근무할 때다. 이 연구소에 함께 있던 크리스티안 바트린 교수와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체제 전환’ 석학으로 유명하며 유럽 통합과 동서독 통일 과정에도 깊이 관여한 학자다. 하루는 대북(對北) 쌀 지원 사진이 실린 영자 신문을 들고 와서 “이런 기사가 나오면 상대방은 받고도 기분 나쁜 법”이라며 “통일을 원한다면 조용히 지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서독의 동독 지원액은 1973년부터 통일될 때까지 약 917억마르크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중 86% 정도는 파악이 어려운 교회나 민간단체, 개인들의 인도적 지원이나 비자수수료 등이었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정부 차원의 지원은 약 144억마르크(14%)에 불과했다. 이 돈도 동독의 수출경쟁력이나 경제 개발보다는 채무 상환과 대외신용도 유지에 대부분 쓰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정형곤, ‘서독의 동독 지원 및 효과 분석’).
당시 기민당(CDU) 정부는 단계적 통일론과 1연방 2체제를 지지했으나, 베를린 장벽을 넘어오는 동독 주민들의 열광을 목격한 헬무트 콜 총리는 2체제 통일론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1체제로의 통일’을 선언했다(1989년 12월19일). 동서독 화폐 교환 비율도 연구기관들은 1.3 대 1 정도가 구매력에 적합하다고 분석했지만, 실제는 1 대 1로 결정했다. 동독 주민에게 대규모의 보조금을 준 것이다. 동독의 대외 채무도 전부 인수하겠다고 선언하고 통일 독일에 대한 국가 승인을 얻어냈다.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은 독일 통일을 내켜 하지 않았다. 통일을 향한 구심력보다 이를 반대하는 원심력이 크면 통일이 어렵다고 본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69년부터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했다. ‘서방정책’을 중시한 콜 총리는 이 동방정책도 이어받아 ‘접근을 통한 변화’를 이끌어갔다. 정권에 관계없이 20년 이상 동방정책을 추진했기에 구심력이 커진 것이다.
통독 5주년이 됐을 때다. 연방경제부에서 통일 과정에 참여한 학자, 전문가 등을 초청해 비공개 세미나를 열었다. 필자도 바트린 교수의 협조 덕분에 참석할 수 있었다. 화폐 교환 비율을 1 대 1로 한 결과 동독 경제가 평가 절상돼 농업까지도 몰락했으며, 생계비는 6개월 만에 서독의 60% 수준으로 올랐는데 생산성은 5년이 지나서야 그 수준에 도달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 격차의 상당액은 재정 지원으로 메웠다는 얘기다. 통일 25년이 지난 뒤 동독의 1인당 소득은 서독의 53%에서 82% 수준까지 따라잡았다. 그간 동독 지역으로 약 3000조원의 이전지출이 흘러갔다. 제3국이 이런 지원을 해 줄까. 통일이든 평화 유지든 공짜 도시락은 없다. 양 당사자의 경제력 격차를 좁혀 가는 것이 통일 준비임을 그는 강조했다.
한편 당시 동독 비밀경찰 수장이 전향하면서 동독 경제의 실상 통계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는데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분석해 보니 틀린 통계로 밝혀졌다. 결론은 그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통계 조작을 자주 하다 보니 사실이 뭔지를 모르게 된 것이란다.
“통일은 정치로 시작해서 경제 대책으로 끝맺는데,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정밀 분석할 여유가 없었다”며 한국은 평소에 잘 준비해 둘 것을 노(老)교수는 당부했다. 늦었지만 그의 말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온 것이 축복이다. 교수님의 건강을 빈다.
1996년 독일 경제정책연구소에 파견 근무할 때다. 이 연구소에 함께 있던 크리스티안 바트린 교수와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체제 전환’ 석학으로 유명하며 유럽 통합과 동서독 통일 과정에도 깊이 관여한 학자다. 하루는 대북(對北) 쌀 지원 사진이 실린 영자 신문을 들고 와서 “이런 기사가 나오면 상대방은 받고도 기분 나쁜 법”이라며 “통일을 원한다면 조용히 지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서독의 동독 지원액은 1973년부터 통일될 때까지 약 917억마르크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중 86% 정도는 파악이 어려운 교회나 민간단체, 개인들의 인도적 지원이나 비자수수료 등이었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정부 차원의 지원은 약 144억마르크(14%)에 불과했다. 이 돈도 동독의 수출경쟁력이나 경제 개발보다는 채무 상환과 대외신용도 유지에 대부분 쓰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정형곤, ‘서독의 동독 지원 및 효과 분석’).
당시 기민당(CDU) 정부는 단계적 통일론과 1연방 2체제를 지지했으나, 베를린 장벽을 넘어오는 동독 주민들의 열광을 목격한 헬무트 콜 총리는 2체제 통일론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1체제로의 통일’을 선언했다(1989년 12월19일). 동서독 화폐 교환 비율도 연구기관들은 1.3 대 1 정도가 구매력에 적합하다고 분석했지만, 실제는 1 대 1로 결정했다. 동독 주민에게 대규모의 보조금을 준 것이다. 동독의 대외 채무도 전부 인수하겠다고 선언하고 통일 독일에 대한 국가 승인을 얻어냈다.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은 독일 통일을 내켜 하지 않았다. 통일을 향한 구심력보다 이를 반대하는 원심력이 크면 통일이 어렵다고 본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69년부터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했다. ‘서방정책’을 중시한 콜 총리는 이 동방정책도 이어받아 ‘접근을 통한 변화’를 이끌어갔다. 정권에 관계없이 20년 이상 동방정책을 추진했기에 구심력이 커진 것이다.
통독 5주년이 됐을 때다. 연방경제부에서 통일 과정에 참여한 학자, 전문가 등을 초청해 비공개 세미나를 열었다. 필자도 바트린 교수의 협조 덕분에 참석할 수 있었다. 화폐 교환 비율을 1 대 1로 한 결과 동독 경제가 평가 절상돼 농업까지도 몰락했으며, 생계비는 6개월 만에 서독의 60% 수준으로 올랐는데 생산성은 5년이 지나서야 그 수준에 도달했다는 분석도 있었다. 이 격차의 상당액은 재정 지원으로 메웠다는 얘기다. 통일 25년이 지난 뒤 동독의 1인당 소득은 서독의 53%에서 82% 수준까지 따라잡았다. 그간 동독 지역으로 약 3000조원의 이전지출이 흘러갔다. 제3국이 이런 지원을 해 줄까. 통일이든 평화 유지든 공짜 도시락은 없다. 양 당사자의 경제력 격차를 좁혀 가는 것이 통일 준비임을 그는 강조했다.
한편 당시 동독 비밀경찰 수장이 전향하면서 동독 경제의 실상 통계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는데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분석해 보니 틀린 통계로 밝혀졌다. 결론은 그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통계 조작을 자주 하다 보니 사실이 뭔지를 모르게 된 것이란다.
“통일은 정치로 시작해서 경제 대책으로 끝맺는데,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정밀 분석할 여유가 없었다”며 한국은 평소에 잘 준비해 둘 것을 노(老)교수는 당부했다. 늦었지만 그의 말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온 것이 축복이다. 교수님의 건강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