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비핵화(非核化) 없는 정상회담은 의미 없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8년 신년사에서 제기한 통남봉미(通南封美) 카드는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 그 효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올림픽 개·폐회식에 김정은의 특사단이 방남(訪南)하고, 답방형식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단도 방북했다. 그리고 지난 6일 밤 대북 특사단은 방북결과를 6개 항의 언론발표문으로 공개했다.

발표문의 골자는 △4월 말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의지표명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북·미 대화 용의 △대화 중 북한의 도발중단 △남북 정상 간 핫라인 설치 등이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대북 특사단 방북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과거행태를 보면 발표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이번 합의에서 김정은은 ‘꼬리표 달린 비핵화’를 강조했다. 즉,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안전 보장 그리고 선(先) 북·미 대화를 요구했다. 김정일이 애용하던 ‘비핵화 유훈’도 되풀이했다. 이는 북한의 핵개발 사실이 알려진 1990년대부터 상투적으로 사용해온 선전 문구들이라는 점에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특히 군사위협 해소와 체제안전 보장을 평화체제로 포장해 남남갈등과 한·미 이간의 도구로 악용해 온 전략도 반복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사실 1994년의 제네바 핵합의나 2005년 9·19 공동선언과 같은 정치적 합의는 이번에 발표된 합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북한과의 정치적 합의가 무용지물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번 대북 특사단이 들고 온 정치적 합의의 수명도 길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방도를 찾는 것이 당면과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핵이 한국을 적화(赤化)흡수통일하는 무기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신년사를 분기점으로 제3차 남북정상회담 합의까지 일련의 과정을 보면 북한은 ‘평창’을 매개로 ‘국제공조의 제재국면을 민족공조의 대화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한 통과의례를 무난히 치렀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적극적 조력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북한의 이런 국면전환이 가능했다. 제재에서 대화로의 국면전환 과정에서 북한은 핵무력 진화를 위한 시간벌기와 경제회생의 길을 도모할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은 한반도 위기의 근원인 북핵 해결의 처방전을 갱신하는 데 실패했다.

김정은 신년사의 골자는 ‘국가핵무력 완성’과 ‘통남봉미’다. 이는 ‘핵이 있는 상태에서의 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핵이 있는 상태에서의 대화는 평창올림픽 기간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방남에서도 확인됐다. 또 북한헌법과 당 강령은 핵보유국을 상수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묵과할 수 없다. 통남봉미 카드는 국제공조의 대북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고 앞으로 더 큰 위력을 발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나왔다. 이는 북한의 절박한 현실이 표출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통남봉미 카드는 북한의 근원적 변화를 유도할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핵이 있는 대화’를 ‘핵이 없는 대화’로 전환할 지렛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핵무력이 김정은 체제의 버팀목인 상황에서 대화를 통한 북한 비핵화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5년 역사의 교훈은 북한의 근원적 변화가 수반돼야 북한의 비핵화도 가능해질 것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로 체제의 근원적 변화는 경제위기에 따른 대중의 불만, 지배계급의 자신감 상실 등에 기인한다. 북한에서 ‘제2의 고난의 행군’이 예측되는 지금이 북한의 근원적 변화를 추동할 적기인 것이다. 4월 정상회담에서 ‘핵이 없는 대화’를 위한 발판을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반도 평화정착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