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남미의 태양이 와인을 빚는 곳… '맛있는 나라'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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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가장 긴 나라 … 칠레 와인투어
승마로 둘러보는 '세계의 과수원'… 저녁엔 카사블랑카 밸리 백포도주 한 잔
천혜의 요새 같은 백포도주 명산지
카사블랑카 밸리
드넓은 와이너리, 레스토랑·와인바
여행자들 반겨
와인 곁들이는 해산물 요리
남미식 식사에 마음마저 느긋
걷다 발아프면 승마로 투어
이곳이 천국이지
승마로 둘러보는 '세계의 과수원'… 저녁엔 카사블랑카 밸리 백포도주 한 잔
천혜의 요새 같은 백포도주 명산지
카사블랑카 밸리
드넓은 와이너리, 레스토랑·와인바
여행자들 반겨
와인 곁들이는 해산물 요리
남미식 식사에 마음마저 느긋
걷다 발아프면 승마로 투어
이곳이 천국이지
춥고 탁한 날들이 계속되니 문득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싶어진다. 남반구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자란 과일이나 남태평양 연안의 해산물 요리를 맛보고 싶다. 올해 독립 200주년을 맞아 전 세계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는 칠레는 어떨까? 지구상에서 가장 긴 나라이자 매력적인 나라인 칠레는 바야흐로 여름이다. 마침 <론리플래닛 2018년 최고의 여행지(Lonely Planet Best in Travel 2018)> 1위로 선정됐다. 무엇보다 칠레는 맛있는 나라다. 개성 있는 요리와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 나라로 행복한 여행을 떠나보자.
칠레=글·사진 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유럽식 대성당과 현대적인 빌딩 산티아고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30시간 만에 드디어 창밖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긴 산맥 안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새하얀 구름 아래 드리운 만년설이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한참 아래 산자락에 조성된 계단식 밭들이 멀리서는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굵은 선처럼 보인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안데스 풍경이 칠레 여행의 포문을 근사하게 열고 있다.
지구 반대편 칠레는 계절이 한국과 반대다. 수도 산티아고(Santiago)에 도착해 마시는 공기가 마냥 따사롭다. 칠레 사람들이 평소 즐겨 마시는 초록빛 과일 체리모야(cherimoya) 주스를 마시니 비로소 도착했다는 실감이 든다. 이 새콤달콤한 과일을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아는 가장 맛있는 과일’이라고 극찬했다. “칠레는 ‘세계의 과수원’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과일이 자랍니다. 과일 이외에 남북으로 긴 국토에서 다양한 식재료가 탄생하죠. 자연이 천연 요새를 이룬 청정지역으로도 유명한데 칠레를 둘러싼 안데스, 남극해, 아타카마 사막, 태평양이 방어막을 이뤄 병충해가 넘어오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번 여행 안내를 위해 나온 나탈리아(Natalia)가 말한다. 그가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는 이번 여행의 목표가 칠레의 토양에서 자라는 다양한 먹거리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탈리아와 길이 4270㎞에 이르는 길쭉한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식품을 접했다.
남미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나라인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첫인상은 여느 대도시 못지않다. 고층 빌딩, 근사한 레스토랑, 쭉 뻗은 대로 등이 메트로폴리탄의 면모를 보여준다. 중심부로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옛 모습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르마스(Armas) 광장을 중심으로 산티아고 대성당, 대통령궁, 헌법광장, 박물관 등이 이어진다. 그중 최대 볼거리는 1500년대 중반에 에스파냐인들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세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야자수가 겹치는 정면은 남미다운 첫인상을 주고, 옆에서 보면 초대형 빌딩이 겹쳐 대조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안으로 들어가니 종교화와 성물들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드리운다. 시민과 관광객이 뒤섞인 광장은 떠들썩하고 경쾌하다. 주변을 지키는 기마 경찰들의 모습마저 활기가 넘친다.
백포도주 명산지인 카사블랑카 밸리
산티아고에서 서쪽으로 120㎞ 떨어진 해안에는 언덕을 따라 형형색색의 벽화와 알록달록한 집들이 이어지는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Valparaiso)가 있다. 발(Val)은 ‘골짜기’, 파라이소(Paraiso)는 ‘천국’을 뜻해 ‘천국의 골짜기’라는 의미다. 1544년 에스파냐의 원정대가 살기 좋은 기후와 아름다운 언덕을 보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세계로 연결되는 항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세기 건축물이 남아 있는 반원형의 언덕 마을은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멀리서부터 언덕을 따라 오르는 교통수단이 보여 나탈리아에게 케이블카냐고 물었더니, 아센소르(Asensor)라 불리는 야외 엘리베이터란다. 빌딩이 아니라 언덕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라니! 더 놀라운 건 무려 135년 전인 1883년에 만들어졌다는 것. 산비탈 경사면을 따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마냥 신기해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벽화마을에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목적지는 발파라이소 외곽의 백포도주 명산지인 카사블랑카 밸리(Casablanca Valley)다. “1850년대에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포도나무 진딧물이 창궐해 전 세계 와인에 영향을 끼친 일이 있었어요. 유명 와인 생산지들을 초토화할 정도로 파괴력이 강했는데 칠레를 둘러싼 천연 요새는 뚫을 수 없었답니다. 당시 치명적인 해를 입은 유럽 와인 생산자들이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등의 새로운 땅을 찾았는데 칠레도 그중 하나랍니다.” 카사블랑카 밸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테틱(Matetic) 와이너리에 도착하자 발파라이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언덕 아래로는 포도밭이 뻗어 나가고,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테라스에 앉아 와인을 즐긴다.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드넓은 와이너리 안에는 레스토랑, 와인 바, 부티크 호텔 등이 조성돼 있고 자전거나 말을 타고 포도밭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보인다. “‘카사블랑카 밸리와 그 주변 지역은 기후가 서늘해서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같은 백포도주 품종이 잘 자라요. 적포도주 중에서는 선선한 기후를 필요로 하는 피노 누아가 나오죠.” 여러 와인에 남미의 해산물 요리를 곁들인 점심이 시작됐다. 회처럼 얇게 저민 해산물에 다진 양파와 허브를 넣고 레몬즙을 뿌린 세비체(ceviche)는 신선하고, 커다란 접시에 새우, 조개, 오징어 등을 듬뿍 올린 해산물 요리 하르딘 데 마리스코(Jardin de Mariscos)도 든든하다. 천천히 즐기는 남미 식사 덕분에 마음마저 느긋해진다.
독립 영웅의 이름 딴 중앙의 농경지
칠레에서는 포도뿐만 아니라 블루베리, 키위, 레몬, 체리, 호두 등이 다양하게 자란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어서 다양한 기후에서 서로 다른 과실이 열매를 맺는다.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의 남쪽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지역은 중간 허리에 속한다. 칠레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장군의 이름을 딴 곳으로 칠레의 중앙에 있다. 소박한 풍경이 매력적인 작은 마을 샌프란시스코 드 모스타잘(San Francisco de Mostazal)의 체리 농장에 들렀다. 체리 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면 여느 벚꽃 비경 못잖은 모습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난해 체리 농사가 역대 최고의 풍작을 이뤘어요. 칠레에서는 보통 매년 11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수확하는데 이번 작황이 아주 좋아요.” 예쁘게 하트 모양으로 여문 열매들의 사진을 찍었더니 농장 주인 말이 정확한 하트 모양을 한 체리는 보기도 좋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윗길이란다. 비가 많이 와도 빗물이 사선으로 금방 흘러내려 둥근 체리들보다 피해를 덜 입는다고. 그 말을 듣고 맛을 보니 과연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달다. 인근에 있는 랑카과(Rancagua) 마을의 호두 농장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넓게 뻗은 가지들이 하늘을 뒤덮어 지붕을 이루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 숲을 방불케 한다. 잎새 사이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에서 신비로운 느낌마저 감돈다. “이곳의 호두들은 큰 일교차와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잘 여물고 모양도 예뻐요. 특히 속 알맹이가 날개를 활짝 편 나비 모양인 것들은 마리포사(스페인어로 나비)라고 해서 인기가 많죠.” 앞으로는 과일을 먹을 때 모양을 한 번쯤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인근의 산 페르난도(San Fernando) 지역을 통과하다가 작은 식당을 발견하곤 차를 세웠다. 칠레 사람들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은 뭘까 궁금해서다. 가장 흔한 건 구운 고기에 감자튀김과 달걀부침을 얹은 아 로 포브레(a lo pobre)다. 많은 열량을 한 번에 섭취할 수 있게 만든 노동자들의 식사에서 유래된 요리라고 한다. 갈비처럼 크게 썬 고기에 감자를 비롯한 채소를 넣고 끓인 카수엘라(cazuela)는 안에 밥알처럼 쌀까지 듬뿍 들어서 국밥처럼 정겹다. 집집마다 요리법이 다른데 이렇게 쌀을 넣어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가 많단다. 우리나라 소주 같은 칠레의 국민 술 피스코(Pisco)도 곁들였다. 포도주를 증류해 만든 브랜디인데, 예부터 칠레와 페루의 접경지역에서 생산돼 어디가 원조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몬즙과 설탕을 넣은 칵테일 피스코 사워(pisco sour)를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 것 같다.
와이너리 마차 투어하고 요리 향연 즐기고
칠레 먹거리 여행의 마지막은 좀 더 남쪽에 있는 콜차과 밸리(Colchagua Valley)에서 절정을 이룬다. 칠레는 여러 농산물 중에서도 특히 포도주로 명성 높은데, 콜차과 밸리는 대표적인 적포도주 산지로서 먼저 다녀온 카사블랑카 밸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몬테스’ ‘산페드로’ 같은 유수의 와이너리들이 모여 있고, 근사한 레스토랑도 있어서 미식가들이 엄지를 치켜세우곤 한다. 그중에서도 뷰 마넨(Viu Manent) 와이너리는 ‘콜차과 와인 관광의 개척자(pioneer of wine tourism in the Colchagua)’로 불린다. 와인 시음은 물론 요리 수업도 열리고 승마나 포도밭 마차 투어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특별히 칠레 요리 홍보대사인 필라 로드리게스(Pilar Rodriguez) 셰프가 요리한다고 한다.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인 그는 서울을 방문해 요리 쇼를 펼친 적이 있어 한국과 인연도 있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함께한 일행은 물론이고 그동안 둘러본 농장이나 와이너리 사람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마치 친구 집에 모여 파티라도 하는 기분. 지금까지 지나온 여러 토양에서 자란 과일과 육류로 만든 요리들이 나왔다. 하이라이트는 흑맥주에 재운 돼지 볼살과 꿀에 조린 삼겹살! 한국에서 온 여행자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란다. 정성스레 조리한 돼지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으니 지구를 반 바퀴 날아온 기쁨이 배가된다. 식사 후에는 마차에 올라 포도밭을 누비며 카베르네 소비뇽, 말벡, 카르미네르 등 여러 와인을 맛봤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먹거리 여행을 해보자고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지구상 가장 먼 나라가 부쩍 가깝게 다가온다. 마치 다정한 이웃처럼!
여행 정보
인천에서 산티아고로 바로 가는 항공편은 없다. 파리, 마드리드, 댈러스 등을 경유하는데, 최근 미국 입국 심사가 강화됨에 따라 유럽 경유가 선호되고 있다. 시차는 수도 산티아고가 서울보다 12시간 늦고, 전압은 한국과 동일하게 220V를 쓴다. 화폐는 칠레 페소를 쓰는데 보통 달러나 유로로 환전해 가서 현지에서 페소로 바꾼다. 2018년 1월 기준 1칠레 페소는 1.76원이다. 경제는 남미에서 가장 발달해 있고 치안도 안전하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쓰며 산티아고의 주요 관광지와 호텔에서는 영어도 통한다. 기후는 위도에 따라 아열대, 사막, 지중해성, 온대, 한랭 등 다양한데, 수도 산티아고는 겨울 최저 기온 1도, 여름 최고 기온 31도 정도다. 9~11월까지의 봄이나 2~4월까지의 가을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 5월 중순부터 9월 중순 사이에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칠레=글·사진 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유럽식 대성당과 현대적인 빌딩 산티아고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30시간 만에 드디어 창밖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긴 산맥 안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새하얀 구름 아래 드리운 만년설이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한참 아래 산자락에 조성된 계단식 밭들이 멀리서는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굵은 선처럼 보인다.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안데스 풍경이 칠레 여행의 포문을 근사하게 열고 있다.
지구 반대편 칠레는 계절이 한국과 반대다. 수도 산티아고(Santiago)에 도착해 마시는 공기가 마냥 따사롭다. 칠레 사람들이 평소 즐겨 마시는 초록빛 과일 체리모야(cherimoya) 주스를 마시니 비로소 도착했다는 실감이 든다. 이 새콤달콤한 과일을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아는 가장 맛있는 과일’이라고 극찬했다. “칠레는 ‘세계의 과수원’이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과일이 자랍니다. 과일 이외에 남북으로 긴 국토에서 다양한 식재료가 탄생하죠. 자연이 천연 요새를 이룬 청정지역으로도 유명한데 칠레를 둘러싼 안데스, 남극해, 아타카마 사막, 태평양이 방어막을 이뤄 병충해가 넘어오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번 여행 안내를 위해 나온 나탈리아(Natalia)가 말한다. 그가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는 이번 여행의 목표가 칠레의 토양에서 자라는 다양한 먹거리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탈리아와 길이 4270㎞에 이르는 길쭉한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식품을 접했다.
남미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한 나라인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첫인상은 여느 대도시 못지않다. 고층 빌딩, 근사한 레스토랑, 쭉 뻗은 대로 등이 메트로폴리탄의 면모를 보여준다. 중심부로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옛 모습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르마스(Armas) 광장을 중심으로 산티아고 대성당, 대통령궁, 헌법광장, 박물관 등이 이어진다. 그중 최대 볼거리는 1500년대 중반에 에스파냐인들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세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야자수가 겹치는 정면은 남미다운 첫인상을 주고, 옆에서 보면 초대형 빌딩이 겹쳐 대조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안으로 들어가니 종교화와 성물들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드리운다. 시민과 관광객이 뒤섞인 광장은 떠들썩하고 경쾌하다. 주변을 지키는 기마 경찰들의 모습마저 활기가 넘친다.
백포도주 명산지인 카사블랑카 밸리
산티아고에서 서쪽으로 120㎞ 떨어진 해안에는 언덕을 따라 형형색색의 벽화와 알록달록한 집들이 이어지는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Valparaiso)가 있다. 발(Val)은 ‘골짜기’, 파라이소(Paraiso)는 ‘천국’을 뜻해 ‘천국의 골짜기’라는 의미다. 1544년 에스파냐의 원정대가 살기 좋은 기후와 아름다운 언덕을 보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세계로 연결되는 항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세기 건축물이 남아 있는 반원형의 언덕 마을은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멀리서부터 언덕을 따라 오르는 교통수단이 보여 나탈리아에게 케이블카냐고 물었더니, 아센소르(Asensor)라 불리는 야외 엘리베이터란다. 빌딩이 아니라 언덕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라니! 더 놀라운 건 무려 135년 전인 1883년에 만들어졌다는 것. 산비탈 경사면을 따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마냥 신기해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벽화마을에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목적지는 발파라이소 외곽의 백포도주 명산지인 카사블랑카 밸리(Casablanca Valley)다. “1850년대에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포도나무 진딧물이 창궐해 전 세계 와인에 영향을 끼친 일이 있었어요. 유명 와인 생산지들을 초토화할 정도로 파괴력이 강했는데 칠레를 둘러싼 천연 요새는 뚫을 수 없었답니다. 당시 치명적인 해를 입은 유럽 와인 생산자들이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등의 새로운 땅을 찾았는데 칠레도 그중 하나랍니다.” 카사블랑카 밸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테틱(Matetic) 와이너리에 도착하자 발파라이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언덕 아래로는 포도밭이 뻗어 나가고,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테라스에 앉아 와인을 즐긴다.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드넓은 와이너리 안에는 레스토랑, 와인 바, 부티크 호텔 등이 조성돼 있고 자전거나 말을 타고 포도밭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보인다. “‘카사블랑카 밸리와 그 주변 지역은 기후가 서늘해서 소비뇽 블랑, 샤르도네 같은 백포도주 품종이 잘 자라요. 적포도주 중에서는 선선한 기후를 필요로 하는 피노 누아가 나오죠.” 여러 와인에 남미의 해산물 요리를 곁들인 점심이 시작됐다. 회처럼 얇게 저민 해산물에 다진 양파와 허브를 넣고 레몬즙을 뿌린 세비체(ceviche)는 신선하고, 커다란 접시에 새우, 조개, 오징어 등을 듬뿍 올린 해산물 요리 하르딘 데 마리스코(Jardin de Mariscos)도 든든하다. 천천히 즐기는 남미 식사 덕분에 마음마저 느긋해진다.
독립 영웅의 이름 딴 중앙의 농경지
칠레에서는 포도뿐만 아니라 블루베리, 키위, 레몬, 체리, 호두 등이 다양하게 자란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어서 다양한 기후에서 서로 다른 과실이 열매를 맺는다.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의 남쪽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지역은 중간 허리에 속한다. 칠레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장군의 이름을 딴 곳으로 칠레의 중앙에 있다. 소박한 풍경이 매력적인 작은 마을 샌프란시스코 드 모스타잘(San Francisco de Mostazal)의 체리 농장에 들렀다. 체리 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면 여느 벚꽃 비경 못잖은 모습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난해 체리 농사가 역대 최고의 풍작을 이뤘어요. 칠레에서는 보통 매년 11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수확하는데 이번 작황이 아주 좋아요.” 예쁘게 하트 모양으로 여문 열매들의 사진을 찍었더니 농장 주인 말이 정확한 하트 모양을 한 체리는 보기도 좋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윗길이란다. 비가 많이 와도 빗물이 사선으로 금방 흘러내려 둥근 체리들보다 피해를 덜 입는다고. 그 말을 듣고 맛을 보니 과연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달다. 인근에 있는 랑카과(Rancagua) 마을의 호두 농장도 함께 볼 수 있었다. 넓게 뻗은 가지들이 하늘을 뒤덮어 지붕을 이루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 숲을 방불케 한다. 잎새 사이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모습에서 신비로운 느낌마저 감돈다. “이곳의 호두들은 큰 일교차와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잘 여물고 모양도 예뻐요. 특히 속 알맹이가 날개를 활짝 편 나비 모양인 것들은 마리포사(스페인어로 나비)라고 해서 인기가 많죠.” 앞으로는 과일을 먹을 때 모양을 한 번쯤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인근의 산 페르난도(San Fernando) 지역을 통과하다가 작은 식당을 발견하곤 차를 세웠다. 칠레 사람들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은 뭘까 궁금해서다. 가장 흔한 건 구운 고기에 감자튀김과 달걀부침을 얹은 아 로 포브레(a lo pobre)다. 많은 열량을 한 번에 섭취할 수 있게 만든 노동자들의 식사에서 유래된 요리라고 한다. 갈비처럼 크게 썬 고기에 감자를 비롯한 채소를 넣고 끓인 카수엘라(cazuela)는 안에 밥알처럼 쌀까지 듬뿍 들어서 국밥처럼 정겹다. 집집마다 요리법이 다른데 이렇게 쌀을 넣어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가 많단다. 우리나라 소주 같은 칠레의 국민 술 피스코(Pisco)도 곁들였다. 포도주를 증류해 만든 브랜디인데, 예부터 칠레와 페루의 접경지역에서 생산돼 어디가 원조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몬즙과 설탕을 넣은 칵테일 피스코 사워(pisco sour)를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 것 같다.
와이너리 마차 투어하고 요리 향연 즐기고
칠레 먹거리 여행의 마지막은 좀 더 남쪽에 있는 콜차과 밸리(Colchagua Valley)에서 절정을 이룬다. 칠레는 여러 농산물 중에서도 특히 포도주로 명성 높은데, 콜차과 밸리는 대표적인 적포도주 산지로서 먼저 다녀온 카사블랑카 밸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몬테스’ ‘산페드로’ 같은 유수의 와이너리들이 모여 있고, 근사한 레스토랑도 있어서 미식가들이 엄지를 치켜세우곤 한다. 그중에서도 뷰 마넨(Viu Manent) 와이너리는 ‘콜차과 와인 관광의 개척자(pioneer of wine tourism in the Colchagua)’로 불린다. 와인 시음은 물론 요리 수업도 열리고 승마나 포도밭 마차 투어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특별히 칠레 요리 홍보대사인 필라 로드리게스(Pilar Rodriguez) 셰프가 요리한다고 한다.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인 그는 서울을 방문해 요리 쇼를 펼친 적이 있어 한국과 인연도 있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함께한 일행은 물론이고 그동안 둘러본 농장이나 와이너리 사람들도 한자리에 모였다. 마치 친구 집에 모여 파티라도 하는 기분. 지금까지 지나온 여러 토양에서 자란 과일과 육류로 만든 요리들이 나왔다. 하이라이트는 흑맥주에 재운 돼지 볼살과 꿀에 조린 삼겹살! 한국에서 온 여행자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란다. 정성스레 조리한 돼지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으니 지구를 반 바퀴 날아온 기쁨이 배가된다. 식사 후에는 마차에 올라 포도밭을 누비며 카베르네 소비뇽, 말벡, 카르미네르 등 여러 와인을 맛봤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먹거리 여행을 해보자고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지구상 가장 먼 나라가 부쩍 가깝게 다가온다. 마치 다정한 이웃처럼!
여행 정보
인천에서 산티아고로 바로 가는 항공편은 없다. 파리, 마드리드, 댈러스 등을 경유하는데, 최근 미국 입국 심사가 강화됨에 따라 유럽 경유가 선호되고 있다. 시차는 수도 산티아고가 서울보다 12시간 늦고, 전압은 한국과 동일하게 220V를 쓴다. 화폐는 칠레 페소를 쓰는데 보통 달러나 유로로 환전해 가서 현지에서 페소로 바꾼다. 2018년 1월 기준 1칠레 페소는 1.76원이다. 경제는 남미에서 가장 발달해 있고 치안도 안전하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쓰며 산티아고의 주요 관광지와 호텔에서는 영어도 통한다. 기후는 위도에 따라 아열대, 사막, 지중해성, 온대, 한랭 등 다양한데, 수도 산티아고는 겨울 최저 기온 1도, 여름 최고 기온 31도 정도다. 9~11월까지의 봄이나 2~4월까지의 가을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 5월 중순부터 9월 중순 사이에는 스키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