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한 중앙일보 기자 출신 신성호 성균관대 교수. / 사진=최혁 기자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한 중앙일보 기자 출신 신성호 성균관대 교수. / 사진=최혁 기자
“영화 ‘1987’을 두 번 봤어요. 시사회에 초청받아 한 번. 영화가 어떻게 담아냈을까, 사실과 다르게 표현된 부분은 없을까, 끝까지 긴장 풀지 않으면서. 개봉 이튿날 좀 편해진 마음으로 한 번 더 봤죠. 두 번째 볼 때는 몇몇 장면에서 눈물을 훔쳤어요. 암울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서.”

어느 대목이 그렇던가요, 묻자 “박종철 유골 뿌리는 장면에서 그냥 눈물이 났어요” 했다. “박종철이 살아있으면 지금 50대 아닙니까. 중장년이 됐을 텐데…” 그의 눈매가 아련해졌다. 지난 8일 성균관대 호암관에서 만난 신성호 전 중앙일보 기자(사진). 그가 쓴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기사로 한 대학생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 받던 박종철이 질식사했다. 경찰은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그날 저녁 사체를 화장하겠다는 경찰 간부들을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 막아섰다. “아들이 조사 받다가 죽었다는데 당장 화장해 유골 넘겨달라고 할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경찰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급히 상경한 박종철의 아버지에게 사인을 받아냈다. 아들의 ‘변사’에 대해 민·형사상 문제를 일체 거론하지 않겠다는 각서였다. 15일 오후의 일. 바로 그때 기사가 터졌다.

의문사로 묻힐 뻔한 두 차례 큰 고비를 넘겨 진상이 밝혀진 것이다. 30년 세월이 흘러 대학 교수(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가 됐지만 그는 10~20분 단위로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그날 오전 9시50분 ‘마와리’(まわり: 기자가 출입처를 돌아다니며 기삿거리를 찾는다는 뜻의 언론계 은어)를 돌다가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 4과장 방에 들어섰다. “경찰, 큰일 났어.” 그가 던진 한 마디에 심상찮은 사태임을 직감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러게 말입니다” 맞장구치며 반응을 살폈다.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는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 사건의 윤곽이 잡혔다. ‘남영동에서 조사, 서울대생, 사망.’ 방에서 나와 10시10분경 데스크에 보고했다. 중앙일보 사회부가 발칵 뒤집혔다.

두 시간 남짓 추가 취재를 통해 검찰은 쇼크사로 보고 받았다는 사실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이라는 사망자 인적 사항을 알아냈다. 이때가 11시30분, 석간이던 중앙일보의 마감 시간이었다. 신문 1판에 내려면 즉시 기사를 송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보고 받은 데스크는 당시 서울대 출입 김두우 기자(전 청와대 홍보수석)에게 지시, 학교 학적부를 뒤져 박종철이란 이름을 완성했다. 부산 주재 기자는 박종철의 고향집에 연락해 부모가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상경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게 이중삼중 취재를 마친 12시10분쯤에야 비로소 돌아가던 윤전기를 멈추고 2판부터 기사를 실었다.

신 교수는 1987년 당시 이홍규 대검 공안과장의 "경찰, 큰일 났어" 한 마디에서 실마리를 찾아 박종철 사건을 보도했다. / 사진=최혁 기자
신 교수는 1987년 당시 이홍규 대검 공안과장의 "경찰, 큰일 났어" 한 마디에서 실마리를 찾아 박종철 사건을 보도했다. / 사진=최혁 기자
- 11시30분에도 쓸 수 있지 않았나.

“욕심 부리면 초판에 쓸 수 있었다. 와꾸(얼개)는 나왔으니까. 그런데 파장이 클 게 뻔했다. 무조건 확실해야 하는 기사라 신중에 또 신중을 기했다. 당시 이두석 사회부장이 자신 있냐고 내게 거듭 확인했다. 만약 오보면 ‘너, 나, 편집국장, 사장까지 줄줄이 남산(안기부)행’이라면서.”

- 온라인 속보 경쟁 심한 지금이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히면 안 됐다. 지금과는 언론 환경이 다르니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건 무리겠지. 그때는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탓에 언론 매체 자체가 얼마 안 됐다. 1982년 막 법조기자로 출입할 당시에 9개 언론사 기자 25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로 타 매체 보도를 꼼꼼히 확인하는 문화는 있었다.”

- 큰 건이 사회면 2단짜리 기사로 났는데.

“솔직히 당시엔 아쉬웠다. 최소한 사회면 사이드 톱은 될 거라 생각했거든. 선배들이 위로하더라. 미국 워터게이트도 1단짜리 기사로 시작한 거라면서. 돌이켜보면 도리어 그게 의미 있는 것 같다. 정권 치부를 들추는 보도에 몸을 사렸던, 언론 자유가 없는 당시 상황을 가늠해볼 만한 사례 아닌가.”

자문해봤다. 지금이라면, 혹은 나라면, 인적 사항을 100% 파악 못했어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모 씨’ 정도로 기사 쓰지 않았을까. “곧바로 안 쓰고 추가 취재했을 것이다”라는 확답이 안 튀어나왔다. 휴대폰도 노트북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약 두 시간 만에 어떻게 그런 이중삼중 확인 취재 기사가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혹 ‘기레기’가 없던 시절이라 그랬던 것인지도.
신 교수는 "박종철 보도가 불신 받던이 언론이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 사진=최혁 기자
신 교수는 "박종철 보도가 불신 받던이 언론이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 사진=최혁 기자
- 기자 정신이 인상 깊었다.

“사실 80년대는 언론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정부 보도 지침을 받는 뻔한 뉴스만 나오다 보니 그렇게 됐다. 군부 독재의 ‘닫힌 사회’였으니까. 기자들에게 앞다퉈 신문이나 방송에 안 나오는 얘기 좀 알려달라고 했다. 진실은 보도되지 않는 것들 가운데 있다고 여기던 시대였다.”

- 정권의 강압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현재 기레기 담론과도 통하는 것 아닌가.

“오죽하면 ‘땡전 뉴스’(항상 오후 9시 정각을 알리는 땡 소리와 함께 전두환 당시 대통령 관련 내용이 톱 뉴스로 보도된 것)라 불렀겠나. 언론 불신을 깨는 계기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였다. 박종철이라는 대학생은 부잣집도 아니고, 부산의 평범한 집안 자식이란 말이지. 그런 젊은이가 경찰에 끌려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니 기가 막혔던 거다. ‘대학 보내놨더니 데모만 하고 돌아다닌다’며 안 좋게 보던 시민들이 대학생 시위할 때 박수 치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넥타이 부대까지 합류해 ‘독재 타도, 호헌 철폐’ 구호를 외쳤고.”

- 이전엔 그랬던 적이 없었나.

“당시 신문사에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보도에 박수 치고 이런 게 없었는데 그때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회사에 응원과 격려 전화가 빗발쳤다. 끝까지 보도해 달라는 당부가 많았다. 아마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텐데,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와서는 말없이 흐느끼기만 한 분도 있었다.”

- 지금 언론도 그렇게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기레기란 언론인에게 굉장히 부끄럽고 창피한 말이잖나.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당사자인 언론뿐이다. 시민에게 ‘우린 기레기 아니야’, ‘기레기라고 부르지 말라’고 할 일이 아니다. 언론 스스로 기레기가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면 돌파밖에 없다. 무엇보다 사실 보도다. 기사는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분적 실수가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요즘 오보는 그것과는 다르다. 불가피한 오보가 아닌 무책임한 오보가 많다. 틀린 기사까지 일단 베끼고 나중에 팩트를 확인하는 행태부터 고치자. 그래야 언론의 신뢰가 쌓일 것이다. 아무리 인터넷과 모바일이 발달해도 기자의 기본은 사실 확인, 현장 확인이다. 발로 뛰는 게 중요하다.”

지난 8일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신 교수. 앞에 놓인 책은 박종철 보도 30년을 맞아 지난해 펴낸 저서 〈특종 1987〉이다. / 사진=최혁 기자
지난 8일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신 교수. 앞에 놓인 책은 박종철 보도 30년을 맞아 지난해 펴낸 저서 〈특종 1987〉이다. / 사진=최혁 기자
영화 얘기로 돌아갔다. 취재 과정이 생략되거나 단순하게 묘사된 점은 좀 아쉬웠다고. 이를테면 검찰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흘렸고, 기자가 우연히 검찰 간부 방에 들렀다가 알게 된 것처럼 보이는 극중 장면이 그랬다. 현실은 훨씬 복잡했다. 그는 ‘딥 스로트’(Deep Throat: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제보자)가 이홍규 당시 대검 공안과장임을 25년간 묻어뒀다. 심지어 둘만 있을 때도 그때 일을 꺼내지 않았다. 취재원 보호 원칙 때문이었다.

- 대검 공안과장은 왜 자진해 딥 스로트가 되었던 건가.

“보안 유지 주의는 받았는데 되새길수록 화가 났다고 하더라. 조사 받다가 대학생이 죽었다. ‘아무리 독재 정권이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같은 자식 기르는 부모인데 이걸 덮어둬야 하느냐, 생각하던 참에 문 열고 들어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한 마디 던진 거지. 평소 친분 있는 기자가 사건을 아는 듯하니 편하게 말한 것 같다.”

-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끌려가던 시대에 쉽지 않았을 텐데.

“특정 인물이 해냈다기보다는 기자, 검사, 의사 등 각자 자기 분야에서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들이 모여 민주화란 결실을 맺은 것이다. 성직자의 역할 역시 컸다. 영화에서도 여러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나.”

- 직업적 양심을 걸었다는 얘기로 들린다.

“다른 것 없다. 박종철 사건 보도 뒤 민주화운동단체 관계자가 감사의 뜻으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며 연락해왔다.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안 나갔다. 난 기자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박종철 보도는 한국형 탐사보도의 출발점이 됐다. 몇 달이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권력집단의 감춰진 비리를 들춰내 알리는 것이 탐사보도의 본질이다. 당연히 효율성은 떨어진다. 그래도 해야 한다. 언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 믿는다.”

[김봉구의 소수의견]은 통념이나 대세와 거리가 있더라도 일리 있는 주장, 되새겨볼 만한 의견을 소개하는 기획인터뷰입니다. 우리사회의 다양한 작은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편집자 주>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