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한경DB
서울의 한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학생들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한경DB
27일 서울에 있는 일반고인 A고 3학년 교실. 오전 9시가 넘었는데도 자리 절반가량이 비어 있었다. 수시모집에 지원한 학생들이 오전 10시쯤 돼서야 학교에 오는 탓에 1교시는 하는 둥 마는 둥이다. 예체능 계열 학생들은 ‘등교 도장’만 찍고는 곧장 입시학원으로 직행한다.

그럭저럭 자리가 채워져도 수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몇몇 학생을 제외하면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엎드려서 잠을 잔다. 이 학교 고3 담임교사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대한민국 고3 교실 전체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며 “수능 최저학력 기준마저 없어지면 고3 2학기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걱정했다. 고교 시스템이 6학기가 아니라 5학기제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방치된 고3 교실

최근 세종시에선 고교 교장 모임이 열렸다. 최대 화제는 고3 교실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였다. B고 교장은 “수업이 아예 이뤄지지 않는다”며 “3학년 2학기에 해야 할 교육 목표가 분명히 있는데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수시를 택한 수험생의 비중이 큰 학교일수록 파행의 정도는 더하다. 8월 말까지의 내신과 학생부만 대입 전형에 포함돼 2학기는 입시와 무관한 탓이다.

예체능계 학생이 학교의 묵인 아래 실기 학원으로 직행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C고 교장은 “수험생으로선 최대효용의 관점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차피 학교가 실기 지도를 못 해주니 어쩔 수 없다는 얘기다. 한 수험생은 “수업시간에 음악을 듣거나 자더라도 선생님들이 간섭하지 않는다”며 “수업 분위기가 안 좋아 수능 준비생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따로 공부하다가 마치면 입시 학원으로 간다”고 말했다.

◆대책 없는 교육당국

6학기로 규정된 고교 과정이 사실상 5학기제로 운영되고 있음에도 교육당국은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3학년 2학기를 진로탐색 기간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세우고 시·도교육청을 통해 각 고교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교사들은 “입시에 바쁜 아이들을 데려다놓고 한가하게 진로 탐색을 한다는 건 현실에 맞지 않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없애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고3 교실 황폐화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한 교사는 “수시에 합격해도 수능 최저학력 기준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면학 분위기가 어느 정도 유지됐는데 기준이 없어지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교육계 관계자는 “3학년 2학기 성적을 대입과 연계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의 경우 대입 합격장을 받더라도 졸업 후 3학년 2학기 성적을 포함한 최종 학생부를 제출해야 한다. 2학기 성적이 지나치게 떨어졌거나 무단결석이 많으면 합격을 취소하는 식이다.

‘수시 9월, 정시 11월’로 돼 있는 대입 시기를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A고 교장은 “고교 3학년 2학기 교실이 텅텅 비게 된 건 대학의 이기주의도 원인”이라며 “대학이 입학사정기간을 줄여 12월에 뽑거나 1학년 입학 시기를 4월로 늦추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지방대 입학처장은 “정원 채우기에도 바쁜 지방대는 서울·수도권 대학의 입학사정이 모두 끝나야 신입생을 뽑을 수 있다”며 “대입 시기를 늦추면 지방대만 더 힘들어진다”고 지적했다.

박동휘/김봉구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