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CEO & Issue focus] 가상화폐에 빠진 17세 천재 개발자…"더 재밌는 일 해보자" 대학도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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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암호화폐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리크 부테린
비트코인 넘어선 '이더리움 혁명가'
비트코인 넘어선 '이더리움 혁명가'
“비트코인이라고 들어 본 적 있니? 인터넷에서만 존재하는 화폐인데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대.”
2011년 2월 당시 17세이던 비탈리크 부테린은 아버지로부터 암호화폐(가상화폐) 비트코인에 대해 처음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수학, 코딩, 경제학을 이해하기 시작한 그였다. 비트코인은 배움에 대한 그의 열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17세 천재소년, 암호화폐를 만나다
부테린은 “비트코인에는 나름의 수학, 컴퓨터 과학, 암호학, 경제학이 있고 나름의 정치와 사회적 철학도 있다”며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왔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 프랑스어 광둥어 고대그리스어 베이직 C++ 자바 등에 능통했다. 좋아하는 경제학자로 타일러 카우언, 알렉스 태버럭, 로빈 핸슨, 브라이언 캐플런을 꼽았고, 게임 이론의 대가 토머스 셸링과 행동 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 댄 애리얼리의 업적을 토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열 살 때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2012년 국제 정보과학 올림피아드에서 동메달을 받을 정도로 컴퓨터에 통달했다. 이런 그에게 비트코인은 완벽한 통합 수단으로 보였다.
부테린은 비트코인을 가질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았다. 마침 ‘비트코인 위클리’란 블로그 개설자가 5비트코인을 주며 자신을 위해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해 왔다. 당시 가격으로 치면 4달러 정도였다. 그는 20비트코인을 벌었고, 이 중 절반을 티셔츠를 사는 데 소비했다. 그는 “이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벽돌을 쌓는 느낌에 휩싸였다”고 했다.
부테린은 ‘비트코인 매거진’을 창간해 2011년 9월부터 2014년 중반까지 1주일에 10~24시간씩 투자해 글을 썼다. 이제 막 캐나다 워털루대에 들어간 신입생이던 그는 중퇴를 결심했다. 대학 생활도 재미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에서다.
부테린은 2014년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를 제치고 신기술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월드 테크놀로지 어워드’를 받았다. 올해 포천이 선정한 40세 이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40명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공동 10위에 올랐다.
비트코인에서 이더리움으로…
부테린은 비트코인에 흠뻑 빠졌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비트코인을 기반으로 다양한 앱(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 스크립팅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비트코인 개발자들 사이에서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2013년 말 그는 ‘이더리움(Ethereum)’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플랫폼을 제안하는 백서를 내놨다. 이듬해 1월 부테린은 미하이 알리시에, 안토니 디 아이오리오, 찰스 호스킨슨과 이더리움 팀을 구성했다. 스위스에 기반을 둔 이더리움재단이 세워졌고, 그해 7~8월 온라인에서 비트코인으로 이더리움 토큰인 ‘이더(Ether)’를 판매해 개발 자금을 모집했다. 그가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한 이더만 50만 개다. 현재 가치 기준 1억5000만달러(약 1600억원)에 달한다.
부테린이 창안한 이더리움은 블록체인 기반의 오픈 플랫폼이다. 이더리움은 중앙은행의 중재 없이 공급자와 수요자가 직접(P2P) 공유 네트워크를 통해 ‘스마트 계약’ 이행과 검증 과정을 거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재자가 필요 없기 때문에 계약 비용도 적다. 금융거래, 공유경제, 지식재산권, 공급망 추적, 의료, 에너지 등 수많은 산업에 응용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위기도 있었다. 이더리움재단이 벤처캐피털펀드 목적으로 설립한 다오(DAO)가 출범 3주 만에 해킹 공격을 받아 360만 개의 이더리움을 잃어버렸다. 재단 측은 해킹 이전으로 블록을 되돌리는 하드포크를 단행했지만, 해킹된 화폐가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되면서 이더리움의 신·구 버전이 동시에 거래되는 상황이 됐다. 구 버전의 이더리움클래식(ETC)은 신 버전의 이더리움(ETH)과 공존하고 있다. 현재 주도권은 새 버전 쪽에 있다.
타고난 리더
부테린은 리더의 자질을 타고났다. 그의 아이디어와 비전으로 개발자들을 규합해 폭넓은 이더리움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다. 이더리움을 블록체인 기술의 표준으로 정하고 기업에 보다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이더리움 동맹(EEA)에 삼성SDS 마이크로소프트(MS) 인텔 JP모간 도요타 등 150개가 넘는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정부나 인터넷 대기업 같은 거대 조직이 개입해 거래를 통제하는 데 대한 대안으로 탈(脫)중앙화된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계약 플랫폼을 내세운 것이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블록체인 혁명》 저자 돈 탭스콧은 ‘다산의, 열매를 많이 맺는’이란 뜻의 형용사 ‘프롤리픽(prolific)’이 부테린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라고 꼽았다.
비트코인의 창시자가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익명을 쓰고 존재를 감춘 것과 달리, 부테린은 이더리움 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위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올 들어 암호화폐 가격이 급등하고, 일종의 암호화폐인 토큰(디지털 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암호화폐공개(ICO)에 투기 자본이 몰린 데 대해 “거품”이라는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중국 한국 등의 ICO 금지 규제는 “기술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며 “암호화폐를 투자 대상이 아니라 블록체인 기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암호화폐가 달러화 등 법정 화폐를 대체할 수 없다”며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암호화 기능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라고 다소 차분한 진단을 내놨다.
인터넷의 대안으로 부상하는 블록체인 기술 혁명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부테린은 “블록체인은 택시 운전사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고, 우버의 일자리를 빼앗아 택시운전사와 고객을 직접 연결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술 발전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밀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2011년 2월 당시 17세이던 비탈리크 부테린은 아버지로부터 암호화폐(가상화폐) 비트코인에 대해 처음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수학, 코딩, 경제학을 이해하기 시작한 그였다. 비트코인은 배움에 대한 그의 열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17세 천재소년, 암호화폐를 만나다
부테린은 “비트코인에는 나름의 수학, 컴퓨터 과학, 암호학, 경제학이 있고 나름의 정치와 사회적 철학도 있다”며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 왔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 프랑스어 광둥어 고대그리스어 베이직 C++ 자바 등에 능통했다. 좋아하는 경제학자로 타일러 카우언, 알렉스 태버럭, 로빈 핸슨, 브라이언 캐플런을 꼽았고, 게임 이론의 대가 토머스 셸링과 행동 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 댄 애리얼리의 업적을 토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열 살 때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2012년 국제 정보과학 올림피아드에서 동메달을 받을 정도로 컴퓨터에 통달했다. 이런 그에게 비트코인은 완벽한 통합 수단으로 보였다.
부테린은 비트코인을 가질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았다. 마침 ‘비트코인 위클리’란 블로그 개설자가 5비트코인을 주며 자신을 위해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해 왔다. 당시 가격으로 치면 4달러 정도였다. 그는 20비트코인을 벌었고, 이 중 절반을 티셔츠를 사는 데 소비했다. 그는 “이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벽돌을 쌓는 느낌에 휩싸였다”고 했다.
부테린은 ‘비트코인 매거진’을 창간해 2011년 9월부터 2014년 중반까지 1주일에 10~24시간씩 투자해 글을 썼다. 이제 막 캐나다 워털루대에 들어간 신입생이던 그는 중퇴를 결심했다. 대학 생활도 재미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에서다.
부테린은 2014년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를 제치고 신기술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월드 테크놀로지 어워드’를 받았다. 올해 포천이 선정한 40세 이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40명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공동 10위에 올랐다.
비트코인에서 이더리움으로…
부테린은 비트코인에 흠뻑 빠졌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비트코인을 기반으로 다양한 앱(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는 스크립팅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비트코인 개발자들 사이에서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2013년 말 그는 ‘이더리움(Ethereum)’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플랫폼을 제안하는 백서를 내놨다. 이듬해 1월 부테린은 미하이 알리시에, 안토니 디 아이오리오, 찰스 호스킨슨과 이더리움 팀을 구성했다. 스위스에 기반을 둔 이더리움재단이 세워졌고, 그해 7~8월 온라인에서 비트코인으로 이더리움 토큰인 ‘이더(Ether)’를 판매해 개발 자금을 모집했다. 그가 보유하고 있다고 공개한 이더만 50만 개다. 현재 가치 기준 1억5000만달러(약 1600억원)에 달한다.
부테린이 창안한 이더리움은 블록체인 기반의 오픈 플랫폼이다. 이더리움은 중앙은행의 중재 없이 공급자와 수요자가 직접(P2P) 공유 네트워크를 통해 ‘스마트 계약’ 이행과 검증 과정을 거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중재자가 필요 없기 때문에 계약 비용도 적다. 금융거래, 공유경제, 지식재산권, 공급망 추적, 의료, 에너지 등 수많은 산업에 응용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위기도 있었다. 이더리움재단이 벤처캐피털펀드 목적으로 설립한 다오(DAO)가 출범 3주 만에 해킹 공격을 받아 360만 개의 이더리움을 잃어버렸다. 재단 측은 해킹 이전으로 블록을 되돌리는 하드포크를 단행했지만, 해킹된 화폐가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되면서 이더리움의 신·구 버전이 동시에 거래되는 상황이 됐다. 구 버전의 이더리움클래식(ETC)은 신 버전의 이더리움(ETH)과 공존하고 있다. 현재 주도권은 새 버전 쪽에 있다.
타고난 리더
부테린은 리더의 자질을 타고났다. 그의 아이디어와 비전으로 개발자들을 규합해 폭넓은 이더리움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다. 이더리움을 블록체인 기술의 표준으로 정하고 기업에 보다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이더리움 동맹(EEA)에 삼성SDS 마이크로소프트(MS) 인텔 JP모간 도요타 등 150개가 넘는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정부나 인터넷 대기업 같은 거대 조직이 개입해 거래를 통제하는 데 대한 대안으로 탈(脫)중앙화된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계약 플랫폼을 내세운 것이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블록체인 혁명》 저자 돈 탭스콧은 ‘다산의, 열매를 많이 맺는’이란 뜻의 형용사 ‘프롤리픽(prolific)’이 부테린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라고 꼽았다.
비트코인의 창시자가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익명을 쓰고 존재를 감춘 것과 달리, 부테린은 이더리움 안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블록체인 기술 발전을 위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올 들어 암호화폐 가격이 급등하고, 일종의 암호화폐인 토큰(디지털 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암호화폐공개(ICO)에 투기 자본이 몰린 데 대해 “거품”이라는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중국 한국 등의 ICO 금지 규제는 “기술 발전을 저해할 것”이라며 “암호화폐를 투자 대상이 아니라 블록체인 기술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암호화폐가 달러화 등 법정 화폐를 대체할 수 없다”며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암호화 기능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라고 다소 차분한 진단을 내놨다.
인터넷의 대안으로 부상하는 블록체인 기술 혁명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부테린은 “블록체인은 택시 운전사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고, 우버의 일자리를 빼앗아 택시운전사와 고객을 직접 연결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기술 발전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밀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