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스위스 방공호
인구 840만 명에 한반도 면적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영세중립국 스위스. 이 작은 나라에 방공호가 30만 개나 된다. 공용 방공호도 5000개가 넘는다. 수용 규모는 전체 국민 840만 명에 외국인 20만 명까지 가능하다. 루체른의 소넨베르크 터널은 2만 명이 2주간 버틸 수 있는 세계 최대 방공호다. 출입구 두께가 1.5m를 넘고 자체 병원과 발전·급수시설, 공기정화시스템을 완비하고 있다.

집집마다 방사능과 독가스에 대비한 환기·공기여과장치를 갖추고 있다. 주택용 방공호 건축비는 평균 9400달러(약 1060만원)다. 자기 집에 방공호를 짓기 싫으면 별도 비용을 내고 공용 방공호 시설을 배당받는다. 스위스가 방공호 유지 관리에 쓰는 예산만 연간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에 이른다.

스위스는 200여 년 전부터 영구 중립을 보장받은 나라지만, 안보의식과 전시 대비 태세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알프스 전역에 지하 요새만 2만3000곳 이상이다. 만 19~26세 국민은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 민병대로 동원된다. 새 건물을 지을 때 핵 방공호 건축을 의무화한 것은 1963년부터다. 민방위법에 따라 모든 건물은 핵무기 공격이나 생화학 테러, 자연재해 대비 시설을 갖춰야 한다.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지만 핵 방어 시스템만은 확실하게 구축하자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스위스 방공호는 워낙 견고해서 금 보관소로도 쓰인다. 스위스 남부 티치노 칸톤 주의 알프스산맥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금을 보관하는 방공호가 있다. 그 옆에는 개인 전용기 활주로도 있다. 이런 금고형 방공호가 10군데 이상이다.

스위스의 방공 시스템을 보고 독일과 스웨덴, 핀란드 등도 방공호를 늘리고 있다. 최근엔 일본과 미국에서 방공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 때문이다. 일본 오리베사가 제작하는 방공호는 16만5000달러(약 1억8600만원)인데도 주문이 쇄도한다고 한다. 미국의 한 회사는 “미사일이 본토까지 날아올 수 있다는 보도에 5만~10만달러짜리 방공호 주문이 몰려 창사 이후 최고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대피소가 있긴 있다. 민방위 대피소가 서울에 3250개, 전국에 1만8000여 개라고 한다. 행정안전부도 ‘국민재난안전포털’과 ‘안전디딤돌’ 앱을 통해 전국 대피소를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조사 결과 시민 70% 이상이 대피소 위치를 모른다고 답했다. 운 좋게 찾아가도 관리가 안 돼 무용지물인 곳이 많다. 대피소로 지정된 터널이 서울에만 14곳이라는데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나마 비상시 뛰어들어갈 지하철역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