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법제화 미뤄 '행정의 사법화' 초래
노조에 기울어진 관련 법규 손질도 시급
1심 판결이지만 관련 소송 중 최대 규모여서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재판부가 노조 청구액의 38.7%만 인정했지만 1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면 기아차가 실제 부담해야 할 금액은 1조원 내외로 예상된다. 전 직원에게 밀린 임금을 소급 지급해야 해서다.
산업계가 소송 회오리에 휩싸일 것이란 우려도 고조되고 있다. 기업 상황에 따라 임금 체계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아서다. 상시 근로자 100인 이상 115개 기업이 소송 중이다. 기아차 1심 판결을 지켜본 노조들이 법원으로 달려간다면 소송이 기업 규모와 업종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확산될 게 뻔하다.
이런 상황이 빚어지는 것은 법원이 임금협상 관행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데다 상황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이번 판결에서도 재판부는 “회사가 경영난을 겪을 정도가 아니다”며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경영난’ 기준도 명확하지 않지만 상당수 기업이 통상임금이 아니라는 노사 합의를 전제로 상여금을 지급해 온 오래된 관행을 외면한 것이다. 대법원이 통상임금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아 이런 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뭐니뭐니 해도 과거 정부들의 ‘꼼수’다. 근로자 소득인 임금을 ‘물가 관리’ 차원에서 다뤘다. 물가상승률을 인위적으로 낮추려고 기본급을 줄이는 대신 각종 수당을 늘리도록 유도해 임금체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노동부는 1988년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시키는 ‘통상임금 산정기준’ 지침을 내놓고도 30년 가까이 법제화를 미뤘다. 자기 업무인 통상임금 기준 설정을 사법부에 떠넘긴 것이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가 그제 “정부가 통상임금을 명확히 규정하고 현실에 기반한 법적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을 정도다. 노조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노사관련 법규가 사태를 키웠다는 분석도 있다. 사측이 ‘신차 양산 조건 합의권’ 등을 쥔 강성 노조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각종 수당이 기형적으로 증가한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기아차 노사는 치열한 법리 공방을 예고했다. 상급심들은 오락가락하고 있는 신의칙에 대한 합리적 기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하루빨리 ‘통상임금 법제화’를 서둘러 더 이상의 혼란을 막아야 한다. ‘행정의 사법화’를 초래한 이전 정부들의 무책임한 행태야말로 노동 분야 적폐 중의 적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