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채무 독촉장'만 발행하는 노동계
지난해 촛불이 광화문광장을 밝힐 때다. 투쟁 구호를 적은 노동계 깃발이 무더기로 등장한 이후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촛불시위가 탄핵 정국에서 5월 대선으로, 그리고 진보진영의 승리와 진보적 정책 추진으로 이어지며 불안감은 구체화했다. 그간의 역할을 지렛대 삼아 자기 몫을 요구하는 노동계가 노사관계의 돌출 변수가 될 것이라는 걱정 말이다. 주요 업종의 경쟁력은 약해지고 4차 산업혁명 등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적인 위중함으로 걱정은 커질 수밖에.

일본 프랑스는 노동개혁에 속도 내는데

우려는 어쩌면 그렇게 여지없이 현실이 되는지. 새 정부 출범 한 달여, 노동계는 ‘채무 상환 독촉장’을 뿌리고 있다. 외형상의 대상은 1차가 정부, 2차가 산업계지만 내용을 따져보면 1, 2차 모두 산업계다. 노동계는 양대 지침(저성과자 해고, 취업규칙 변경)·성과연봉제·단체협약 시정지도 즉각 폐지와 최저임금 1만원을 정부에 요구했다. 모두 사용자 부담으로 귀결되는 사안이다. 공공부문 노조는 성과연봉제 인센티브로 받은 돈을, 금속노조는 통상임금 소송 승소 때 받을 임금을 비정규직 지원에 쓰겠다며 ‘사회연대책임론’을 내세웠지만 그만큼의 부담을 사용자 측에 요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개혁 논의로 주목받고 있는 나라는 한국 프랑스 일본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실업률을 낮추려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계획하고 있다. 2015년 주 35시간 근로에 필요하면 60시간까지 가능한 법안을 관철한 데 이어 대통령 취임 후엔 초과근로수당 축소, 퇴직금상한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일본은 ‘제이(J)노믹스(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와 비슷한 비정규직 처우 개선, 최저임금 1000엔, 장시간 노동 개선 등의 정책을 시행해 오고 있다. 일본은 그러나 유연근무, 여성·청년의 일자리, 일·가정 양립 확대 등 노동시장 유연화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노동계의 ‘독촉장’에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있는 우리 정부와는 다르다.

노동생산성 담보돼야 낙수효과

노동시장은 노사공존이 전제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정부는 노사공존이나 원만한 노사관계를 위해 제도적·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최근 노동계 움직임에 대해 사회연대책임론의 프레임을 통해 진보성향 정부를 압박하고, 실질적 부담을 사측에 떠넘기는 양동작전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근로자와 개별노조 합의 없이 상급단체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나 현실성에도 의문 부호를 찍고 있다. 유연성과 생산성을 배제한 사회연대책임론은 일자리 창출이나 비정규직 처우 개선의 근본적 대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계의 자가당착이다.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에서의 임금은 노동생산성이 근간이다. 대기업-정규직-유노조 근로자의 노동 가치가 임금(100 대 38.5)처럼 중소기업-비정규직-무노조 근로자보다 훨씬 높은지도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낙수(落水)가 중소기업-무노조-비정규직 근로자에게 흘러간다. 기업과 국가 경쟁력이 강해지고, 더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다.

노동시장의 위기이자 일자리 위기는 노·사·정 모두가 당사자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해결할 수 있다. 산업계도 선도적인 노동시장 유연화와 투자 확대로 일자리 창출에 노력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일자리 해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박기호 선임기자 겸 좋은일터연구소장 kh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