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이다. 세계 3위 경제대국 일본에서 감자 파동이라니. 지난해 태풍으로 감자 흉년이 들어 관련 제품의 씨가 말랐다고 한다. 감자칩 한 봉지 값이 6만원까지 치솟자 최대 업체인 가루비는 ‘감자칩 판매 중단’을 선언했다. 수입량을 늘려서 해결하면 그만일 텐데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일본 감자 쇼크의 이면에는 농업 문제보다 더 큰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단발성 기상이변에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비한 기(氣)싸움의 전조’라고 분석했다. 일본은 감자의 78%를 미국에서 갖다 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아베 정권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틀을 되살리기 위해 감자 품귀 사태를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뒤엔 일본 농업단체의 로비와 농민들의 수입 반대 시위가 있다.

그렇잖아도 감자의 역사는 세계사의 부침과 함께했다. 칠레 원산의 감자가 유럽에 소개된 것은 16세기이지만, 18세기까지는 난치병을 유발하는 ‘악마의 식물’로 여겨졌다. 프랑스 농학자 파르망티에는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왕실에 감자 요리를 선보이며 ‘감자 전도사’를 자임했다.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는 옷단추와 머리에 감자꽃을 달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키면서도 감자를 거부했다. 감자를 일찍 보급했다면 프랑스 혁명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감자를 식용작물로 처음 재배한 나라는 아일랜드다. 황무지에서도 쉽게 자라고 생산량도 많았으니 영국의 지배 아래 헐벗고 굶주리던 이들에겐 신의 축복이었다. 최대 명절인 성 패트릭 데이 주요리도 감자다. 그러나 19세기 감자 기근으로 인구 800만 명 중 100만 명이 굶어죽고 100만 명은 미국 등으로 이주했다. 케네디 대통령 조상도 이때 건너갔다. 미국 상점들에 ‘개와 아일랜드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나붙을 정도로 아일랜드인들이 홀대받던 시절이었다.

감자 번식에 성공한 국가는 인구가 늘고 시장이 활기를 띠었다.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이 높은 아시아와 달리 유럽은 뒤늦게 감자에 눈을 떴다. 밀농사와 비교할 수 없는 인구부양력은 산업혁명의 한 동력이 됐다. 일본에는 1603년 네덜란드를 통해 전파됐다. 19세기 중국에서 들여온 한국보다 200년 앞섰다. 하지만 1인당 감자 소비량은 연간 4㎏대로 미국(62㎏)의 15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TPP 협상 카드로 이번 파동을 역이용하는 걸 보면 감자가 ‘정치적 식물’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듯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