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예능 ‘무한도전’에서 200명의 ‘국민의원’들이 정책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MBC 제공.
MBC 예능 ‘무한도전’에서 200명의 ‘국민의원’들이 정책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MBC 제공.
“공채 탈락 이유를 알 길이 없다. 매번 ‘귀하의 능력은 출중하나…’라고만 한다.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탈락 이유를 공개해 달라.”

“공약을 실천하진 않고 다음 선거에서 또 그 공약을 들고 나온다. 4선 연임을 제한해야 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지원자 탈락 이유 공개법’부터 ‘국회의원 4선 연임 제한법’ ‘직장 내 멘탈 털기 금지법’ ‘알바 근로 보호법’ 등 다양하다. 치열한 토론도 오간다. 누군가 의견을 내면 한편에선 부작용 가능성도 제기한다. 언뜻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민의원’.

지난 8일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200명의 ‘국민’이 출연해 직접 정책 아이디어를 냈다. 방송에 나오진 못했어도 온라인으로 의견을 낸 사람이 약 1만명에 달한다. 단순히 불만을 토로하는 식이 아니다. ‘청소 노동자 쉼터 설치법’ ‘임산부 주차 편리법’ 등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의견을 낸다. 각 정당에서 나온 다섯 명의 국회의원들은 그들의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국민의원들이 내놓은 법안 여섯 개를 국회의원들이 발의하기로 했다. 시민으로서 보고 느낀 것을 시민의 목소리로, 시민이 뽑은 정치인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민’들이 정치 콘텐츠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전엔 정치적 의견을 민주적 절차에 따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탄핵, 조기 대선 등 초유의 사태에 부딪히면서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자각, 새로운 형태의 시민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시민들은 미디어도 능동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동안 정치 콘텐츠는 빠른 속도로 진화했다. SBS플러스의 ‘캐리돌뉴스’처럼 주류 정치권을 패러디하거나, JTBC ‘썰전’과 같은 정치 흐름을 분석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졌다. 이제 시민들은 이 흐름을 타고 스스로 목소리를 낸다.

많은 사람들은 ‘시민’이란 단어를 들으면 먼저 ‘서울 시민’ 등 특정 지역의 거주민을 떠올린다. 외국에선 다르다. 정치적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의 시민을 먼저 생각한다. 한국에선 외국과 달리 시민운동가가 아닌 이상 사회 발전을 위해 유대감을 갖고 행동하는 일이 흔치 않아 생긴 인식의 차이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정치적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정치적 무관심과 혐오를 이겨내고자 했다. 광장에서 콘텐츠를 제작해 유튜브 등에 올리고, 팟캐스트를 통해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자발적으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는 주체가 돼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촛불을 통해 자각된 시민의식은 정치적 유대감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무한도전’에서 한 시민이 ‘국회의원 미팅제’를 발의하자 큰 호응을 얻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기 의견과 같은 사람들만 만나고선 국민의 뜻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들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마련돼야 한다.” 국회의원들은 “미팅부터 소개팅까지 다 가능하다”며 발의를 약속했다.

콘텐츠 제작자들도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단순히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지난달부터 방영되고 있는 JTBC의 예능 ‘차이나는 클라스’는 민주주의, 정의 등 거대하고 심오한 주제에 가볍게 접근한다. ‘질문 있습니다’란 부제에 걸맞게 온갖 질문이 오간다. 방송인 홍진경, 래퍼 딘딘 등 친근하고 평범한 방송인들이 유시민 작가,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등에게 일상 속에서 느낀 민주주의, 정의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물어본다. 잘리지 않은 피자 한 판을 앞에 두고 ‘가장 공정하게 피자를 나눠먹는 법’을 연구하며 정의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국가는 시민의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한 말이다. 2017년 대한민국에서 시민들이 국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한 첫발을 떼고 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