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강릉 향교를 찾는 이유
사학과 학생들과 강원도 답사를 다녀왔다. 강릉에서는 신복사지와 오죽헌, 대도호부, 향교를 방문했다. 조선시대 관아 자리였던 대도호부 일대에는 그동안 큰 변화가 있었다. 국보로 지정된 객사문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던 곳이 이제는 경역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복원 공사가 이뤄졌다. 경기 수원의 화성행궁을 복원할 때처럼 복원 작업이 탄력을 받고 있었다.

강릉 향교에 들렀을 때는 마음이 기뻤다. 지난해에 전북 전주 향교를 방문했다가 실망한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전주 향교에는 오랜 풍상을 견딘 은행나무가 있고 건물이 웅장하면서도 보존이 잘 돼 필자가 늘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한옥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문화행사가 많아지면서 놀이장소로 변해가는 문제점이 있었다.

필자가 강릉에 갈 때마다 향교를 찾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강릉 향교는 700년이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자리에 향교가 세워진 것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13년이고, 보물로 지정된 대성전 건물은 조선 태종 때인 1413년 세워진 것이다. 한국 성균관의 역사가 1310년 개성에서 시작되고, 서울의 성균관은 대학 구내에 600주년기념관이 있으니, 강릉 향교의 역사는 개성의 성균관과 맞먹는다. 이번에 보니 향교로 들어가는 입구에 ‘강릉향교칠백주년기념비’라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

강릉 향교는 옛 제도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향교다. 이곳의 명륜당은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인 데다 특이하게 2층 다락이고 건물 안에는 향교의 역사와 운영 방식, 건물의 증개축을 알려주는 많은 현판이 있다. 명륜당은 원래의 목적에 맞게 지금도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사 공간으로 올라가면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21명의 위패를 모셔놨고 동무(東)에는 58명, 서무(西)에는 5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의 제도지만 이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의 성균관과 다른 지역의 향교에서는 동무와 서무에 있던 한국 학자 18명의 위패를 대성전으로 올려서 제사 지내고, 동무와 서무는 그대로 방치해둔 실정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런 원형을 유지한 곳을 대만에서 한 군데 찾았고 중국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강릉 향교는 위패와 건물의 관리 상태도 매우 좋았다. 봄가을에 있는 석전제(釋奠祭)를 원형대로 거행하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분향례(焚香禮)를 올리면서 청소를 한 때문이다. 관련 책자를 보니 분향례가 있으면 교장에 해당하는 전교와 향교 업무를 담당하는 장의들이 모여서 하룻밤을 재계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향교 곳곳을 청소하고 걸레질을 한다고 한다. 향교의 관리 상태가 좋은 것은 그들의 노력 덕분이다.

강릉 향교의 또 다른 매력은 전통 교육과 현대 교육이 잘 이어진다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강릉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150명이고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408명에 이른다. 조선시대에 이곳이 인재를 배출하는 산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숫자다. 갑오경장 이후 향교는 근대적인 교육 기관으로 바뀌었다. 1909년 화산학교를 시작으로 강릉공립농업학교, 강릉공립여학교, 옥천초등학교, 명륜중학교가 세워졌으며 지금은 명륜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서울의 성균관은 국립대가 되고 지방의 향교들은 공립학교가 됐을 것이다. 강릉 향교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강릉시 교동에 있는 향교와 명륜고등학교는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필자는 그곳에서 명륜고 출신이 대학 교수로 임용됐다는 플래카드를 두 개나 봤다. 대학 교수를 생원진사시나 문과 급제자로 보는가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