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꼬치 예쁘다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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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들의 눈길을 확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해. 눈에 번쩍 띄는 것…. 눈에 띄네? 그래 ‘누네띠네’로 합시다.”
1990년대 초반 삼립식품(현 SPC삼립)은 한국 제빵업계의 대표주자였다. 이 회사는 1992년 과자시장 진출을 앞두고 신제품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중역회의에서 한 임원이 무심코 ‘눈에 띄는 이름’을 중얼거릴 때 다들 귀가 번쩍 뜨였다. 삼립식품이 크림빵, 호빵과 함께 지금도 ‘전설의 히트상품’으로 꼽는 ‘누네띠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누네띠네’의 상업적 성공은 우리말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문법이란 고정관념의 틀을 깨자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졌고 ‘새로움’을 담을 수 있었다.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방식이 각종 작명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때 나온 ‘도우미’를 비롯해 푸르지오, 모메존, 정드린 김치 같은 상품명이 다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만들어졌다. 이 중 도우미는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에 올라 정식으로 단어가 됐다.
차원은 다르지만 60여년 전 이맘때 이승만 대통령도 이런 식의 표기법을 시도했다. 그는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1954년 3월 기존 맞춤법(형태주의)을 뒤엎는 혁명적 담화를 발표했다.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말의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 그러곤 곧바로 그해 7월 ‘한글 간소화안’을 발표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년) 때부터 이어져온 형태주의를 버리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표음주의)는 게 핵심이었다. 가령 ‘꽃이 예쁘다’는 ‘꼬치 예쁘다’로, ‘옳다’는 ‘올타’ 식으로 쓰자는 것이었으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변화였다. 전국에서 탄원과 청원이 잇따르고 거센 국민적 저항이 일었다. 국회로도 비화돼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온나라를 들끓게 한 이 사태는 결국 1955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가라앉았다. 이른바 ‘한글파동’의 전말이다.
이승만의 무모한 시도는 반세기 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일부나마 빛(?)을 봤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가령 ‘싫어’를 ‘시러’로, ‘어떻게’를 ‘어떠케’ 식으로 흘려 쓰는 게 그렇다. 사회관계망(SNS)이 발전하면서 젊은이들이 쓰는 통신언어에선 그런 표기가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국어 파괴 논란도 있지만, 특정한 공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니 지켜볼 일이다. ‘우리말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1990년대 초반 삼립식품(현 SPC삼립)은 한국 제빵업계의 대표주자였다. 이 회사는 1992년 과자시장 진출을 앞두고 신제품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중역회의에서 한 임원이 무심코 ‘눈에 띄는 이름’을 중얼거릴 때 다들 귀가 번쩍 뜨였다. 삼립식품이 크림빵, 호빵과 함께 지금도 ‘전설의 히트상품’으로 꼽는 ‘누네띠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누네띠네’의 상업적 성공은 우리말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문법이란 고정관념의 틀을 깨자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졌고 ‘새로움’을 담을 수 있었다.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방식이 각종 작명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때 나온 ‘도우미’를 비롯해 푸르지오, 모메존, 정드린 김치 같은 상품명이 다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만들어졌다. 이 중 도우미는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에 올라 정식으로 단어가 됐다.
차원은 다르지만 60여년 전 이맘때 이승만 대통령도 이런 식의 표기법을 시도했다. 그는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1954년 3월 기존 맞춤법(형태주의)을 뒤엎는 혁명적 담화를 발표했다. “3개월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말의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 그러곤 곧바로 그해 7월 ‘한글 간소화안’을 발표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년) 때부터 이어져온 형태주의를 버리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표음주의)는 게 핵심이었다. 가령 ‘꽃이 예쁘다’는 ‘꼬치 예쁘다’로, ‘옳다’는 ‘올타’ 식으로 쓰자는 것이었으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변화였다. 전국에서 탄원과 청원이 잇따르고 거센 국민적 저항이 일었다. 국회로도 비화돼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온나라를 들끓게 한 이 사태는 결국 1955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가라앉았다. 이른바 ‘한글파동’의 전말이다.
이승만의 무모한 시도는 반세기 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일부나마 빛(?)을 봤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가령 ‘싫어’를 ‘시러’로, ‘어떻게’를 ‘어떠케’ 식으로 흘려 쓰는 게 그렇다. 사회관계망(SNS)이 발전하면서 젊은이들이 쓰는 통신언어에선 그런 표기가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국어 파괴 논란도 있지만, 특정한 공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니 지켜볼 일이다. ‘우리말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