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제정 러시아의  국정농단  '몸통'
‘한국의 라스푸틴.’ 지난해 10월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드러난 직후 CNN, 가디언,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외신이 그의 이름 앞에 붙인 수식어다. 제정 러시아 말기 세상을 뒤흔든 요승 라스푸틴과 최태민, 최순실 일가 사이에 놀랍도록 비슷한 점이 많아서다.

조지프 푸어만 미국 켄터키주립대 석좌교수가 쓴 전기 《라스푸틴》이 출간됐다. 단순히 추문을 파헤치는 데 그치지 않고 라스푸틴의 삶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과 권력 문제를 들여다본다.

시베리아의 농민 집안에서 태어난 라스푸틴은 ‘종교적 구도자’인 동시에 ‘방탕한 주정뱅이’였다. 그런 그가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것은 그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알려져서였다. 유일한 황태자인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고 있었는데, 라스푸틴이 기도하면 거짓말처럼 출혈이 멈추고 상태가 호전됐다.

라스푸틴은 교회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고, 그의 국정농단이 시작됐다. 총리, 내무장관, 교회 고위직 등에 측근을 기용하는 인사 전횡을 자행했고, 전쟁 등과 관련된 국가 기밀까지 받아봤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거푸 패전하면서 정국은 불안정해졌고 교회는 혼란에 빠졌다. 라스푸틴의 국정농단은 정점에 달했다. 대중은 분노했고, 1916년 12월 그는 암살당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폐위된 니콜라이 2세는 이듬해 가족과 함께 처형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선실세가 자행한 국정농단의 배후에는 그를 무한히 신뢰하며 부당한 권력을 위임한 최고권력자의 무능이 있었음을 저자는 보여준다.(양병찬 옮김, 생각의 힘, 396쪽, 1만7000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