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불행한 일이 현실화했다. 헌법재판소는 어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2016헌나1’)을 헌법재판관 8인의 만장일치로 인용했다. 헌재는 생명권 침해, 언론자유 침해 등은 파면할 정도가 아니지만 최서원(최순실)의 국정농단 부분은 엄중하게 판단했다. 대통령이 최씨의 사익추구에 관여하고 이런 행위가 재임 중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봤다. 또 압수수색, 수사 거부도 파면 사유로 추가했다. 헌재는 “(대통령의) 위헌·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다”며 “파면으로 얻는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그렇게 파면됐다.

헌재 결정의 찬부 논란을 떠나 이로써 모든 법적 절차는 종료됐다. 지난해 12월9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지 92일 만이다. 박 대통령은 곧바로 직위가 박탈돼 전직 신분이 됐다. 직무정지가 아닌, 대통령 궐위 상태가 된 것이다. 후임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60일 내에 뽑아야 한다. 오는 5월9일께 조기 대선이 치러질 전망이다. 지난 넉 달여 동안 나라를 뒤흔든 정국 혼란에 이어 또다시 두 달간 선거로 인한 불확실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훗날 역사는 이 사건을 어떻게 기록할지 알 수 없다.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도 있지만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 간 투쟁에서 국회 권력이 완승했다는 정치적 해석도 나온다. 탄핵정국에 가려진 국회의 월권과 독재, 탄핵이 탄핵을 부르는 정치보복의 일상화에 대한 우려도 많다. 무엇이 진정한 시대정신인지도 확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통령 파면이 더 이상 정치적 재난으로 연결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탄핵이라는 헌정사의 비극적 사건은 이제 끝내야만 한다. 준정치변란적 상황으로 확대하면서 헌정질서를 훼손하는 것이야말로 반국가적, 반헌법적 행위다. 이는 소위 승리자도 패배자도, 촛불도 태극기도 다를 것이 없다. 승리를 거둔 촛불 측이야말로 절제하는 미덕이 필요하다.

정치는 곧바로 대통령 선거국면에 진입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당장 어제부터 대선 예비후보 등록을 시작했다. 유례없이 촉박하고 긴박한 선거일정이 또 다른 정치혼란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 정당과 정파, 정치세력들은 절제하고 자중해야 한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희정 충남지사 등 야권 후보들부터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과 선관위도 국가안보와 질서 유지에 비장한 노력을 기울일 때다. 더 이상의 갈등과 분열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헌재 결정에 대한 찬반 양론은 선거를 통해 극복해야 할 일이다. 선거혁명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게 민주주의다.

그렇지 않아도 혼돈의 넉 달을 보내는 동안 대내외 상황은 갈수록 엄혹해지고 있다. 북한 김정은은 미사일 도발에다 이복형 김정남 암살까지 자행한 마당이다. 북핵·미사일 방어용인 사드를 배치한다고 중국은 전방위 경제보복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북핵 정밀타격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다. 일본과의 관계회복도 요원한 실정이다. 또한 각국의 자국우선주의에 따른 보호무역과 통상압력의 파고는 높아만 간다. 저성장 고령화 속에 성장잠재력을 높여도 모자란 판에 노동개혁, 규제혁파의 동력도 거의 꺼져버린 실정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자칭 대선주자들은 어설픈 포퓰리즘 공약을 남발하는 게 현실이다.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만한 지도자가 있는지 의문이다. 탄핵을 선거공학적 정략 수단으로 삼는다면 더 큰 후폭풍에 직면할 것임을 모든 정파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민의 정치 불신은 탄핵국면에서 잠시 유보돼 있을 뿐이다.

국민도 할 일이 있다. 이제 광장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다함께 나라의 미래를 고민할 때다. 촛불과 태극기 모두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자. 광장 민심이 곧 민주주의요, 헌법정신이라는 일부 지식인들도 미몽에서 깨어날 때다. 누구든 오버하다간 심각한 반작용을 부를 것이다. 국민 모두에게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절제와 인내가 요구된다.

탄핵은 누구의 승리도 될 수 없다. 그간 촛불집회에선 ‘이석기 석방’, ‘사회주의가 답이다’ 등의 구호까지 등장했다. 대한민국 체제를 부인하는 세력까지 용인될 수는 없다. 대통령이 탄핵됐다고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패배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더 강한 나라로 거듭나야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탄핵반대 목소리를 높여온 많은 시민의 허탈함과 좌절감이다. 물러난 박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가 진행될 경우 분노지수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는 인용 시 국민저항본부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지도부가 내전 혁명 등의 선명한 단어를 언급한 적도 여러 차례다. 결정 직후 집회에서 벌써 2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불복종이 아니라 승복을 결단할 때다. ‘8 대 0’ 인용이라는 압도적 결과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점도 이해한다. 단순히 대통령을 지키는 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에 헌신하는 ‘벼랑 끝 싸움’이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승복해야 한다. 탄핵기각보다 더 중요한 일이 바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호하고 확립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리가 함성으로 뒤덮이는 내전적 상황은 민주주의로 보기 힘들다. ‘거리의 정치’는 민주사회의 문법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헌정질서를 위협하게 된다. 무언가의 주장은 헌법 내에서 이뤄질 때 더욱 큰 공감을 일으킨다. 정치적 변란으로 몰고가 단번에 뒤집어 보고 싶은 충동이 있을 것이다. 반법치적 반제도적 저항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행태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박근혜로 상징되는 보수정치를 미아로 만드는 악수가 될 개연성이 높다.

정치세력을 조직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제도의 틀 안에서 대안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그것이 더 많은 동조자를 확보하는 데 더 효율적이다. 탄핵반대 운동에서 보여준 견인불발의 인내심과 노력을 정치에너지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하여 ‘독재적 권력’으로 부상한 국회를 견제하는 일이야말로 탄핵반대파에 부여된 시대적 소명이다.

탄핵으로 보수여당도 구심점을 잃었다. 그렇다고 광장의 촛불이 개선장군처럼 으스대서는 안 된다. 만장일치 탄핵인용으로 ‘진실을 독점했다’는 생각도 큰 오판이다. 헌재가 탄핵소추 사유의 상당수를 ‘증거 없음’으로 판명한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석기 석방’과 같은 광장 일각의 주장에 휩쓸리며 대립을 증폭시키기보다, 반성과 아량을 앞세울 시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정신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점도 분명하다.